학과 사무실로 찾아가서 조교분께 한유진의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내 말을 듣고 학과 조교는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에서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고, 한두 군데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나는 괜히 손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며 사무실에 서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 걱정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교직이수생은 원칙상 1년에 한 번밖에 뽑지 않는다. 한유진은 이번 학기를 완료하지 못했기에, 내년 가을학기에 복학해서 교직이수를 재지원하면 된다고 한다. 조교에게 이 소식을 듣자 그제야 나는 꼼지락대던 손을 가만히 둘 수 있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한유진에게 곧바로 문자를 남겼다. 이 소식을 얼른 전달해주고 싶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차분히 메시지의 글자 수를 세었다. 나는 글자 개수가 짝수라고 확인하고 나서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한유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와 선배! 진짜 고마워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한 입원한 이래로 가장 밝았다. 그 덕에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지만, 내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냐, 어차피 학교 오는 김에 확인해 준 것뿐이니까. 어쨌거나 정말 잘됐다. 다행이야."
"그러니까요! 한 학기를 다시 처음부터 다녀야 되는 건 싫긴 한데, 그래도 교직이수를 아예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해개론 2는 다시 하면 훨씬 수월할 거야. 그때는 튜터링 같은 거 안 해도 될걸."
내 말에 한유진은 털털하게 웃었다. 우리는 별로 의미 없는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다가 통화를 끊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현실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한유진은 아직 병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학기를 강제로 휴학해야 한다. 지난 학기에 들은 강의도 내년에 모두 재수강해야 한다. 다만 아주 사소하지만 한 가지 변한 게 있었다. 한유진과 통화한 다음날 내가 작은 과자세트를 사들고 병문안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결심이 무색하게도 선물을 들고 병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망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쭈뼛주뼛하는 나를 보고 한유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한유진에게 병문안을 갔다. 나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모두 다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간 건 아니었다. 한유진은 여러 시답잖은 부탁을 했는데, 예를 들면 어느 카페에서 파는 타르트를 사줄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학교와 관련된 부탁도 있었다. 학부 조교실에서 그녀가 사고 직전에 제출했던 전공 과제들을 되찾아 오기도 했었다. 아무튼 물건을 부탁받았으니 그걸 전해주려면 자연스럽게 다시 병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를 심부름꾼이나 빵셔틀 같은 거라고 생각하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쌓여있던 무언가가 쓸려 나가서 깨끗하게 치워지는 기분이었다. 한유진과 대화하는 것도 이전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사교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한유진의 친화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정도의 능력이다. 그런 걸 보면 한유진은 확실히 내 동생 지수의 친구가 맞았다.
한유진이라는 사람의 인상이 내 안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만큼,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어느새 방학도 끝자락이었다. 연구 참여 세미나도 무사히 끝났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그 교수님의 연구실 분위기는 좋았다. 교수님의 연구 주제는 물론이고, 대학원생들 간 사이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세미나가 끝난 기념으로 가진 전체 회식에서 나는 교수님께 대학원 진학에 대해 다시 한번 넌지시 말씀드렸다. 나의 소소한 목표를 듣더니 교수님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회식은 다들 술기운이 올라 다소 정신없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나는 이로써 내 미래는 더없이 안정적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모든 것이 괜찮았다. 누가 그랬던가, 위기는 제일 방심할 때 찾아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