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했다. 한유진은 먼저 도착해서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제일 안쪽 창가에 있는 자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먼저 한 다음,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서 돌아왔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선배."
나는 내심 나오기 귀찮은 마음도 있었기에, 그녀가 사과하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고 말했다. "너는 몸은 좀 어때? 퇴원하고는 처음 보네."
"병원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나아요. 가끔 산책도 하고 그러거든요. 선배는 괜찮아요?"
"그러게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제 대학원은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서 막막해."
"진짜 너무 충격적이에요. 우리 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요. 순수 이론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은 다 세상이나 사람한테는 관심 없고 수학만 파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미래가 박살 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몇 번째로 커피를 마시는지 세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자주 말랐다. 그래서 한유진보다 내 커피가 더 빨리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방학 동안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관찰했던 교수님과 그 대학원생의 행태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한유진은 내 얘기를 들으며 여러 차례 경악했다. 그리고 때로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한유진한테 누가 해코지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때까지 여러 번 봤던 모습이지만, 정말인지 이 녀석은 감정 표현이 솔직한 편이다. 지금만큼은 내심 고마웠다. 내 몫까지 화내고 당황해 주는 것 같아서.
"나는 솔직히 연구 참여가 끝날 때까지도 눈치 못 챘어. 여기 연구실 분위기가 좋으니까 대학원 진학하기도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나는 이 말을 내뱉고 11번째로 커피를 마셨다.
"자기들도 숨기려고 했겠죠. 작정하고 숨기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그래도 이번에 내 절망적인 둔감함에도 놀랐거든. 한 번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한유진은 얼굴에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뭘 또 그렇게까지 자기 비하를 하고 그래요. 선배는 좀 매사에 자기 잘못을 찾아내려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순간 미세하게 몸을 움찔했다. 역시 한유진이 수학적 센스가 없다는 말은 기만 같았다. 외부 현상을 보고 이렇게나 그 속의 핵심을 잘 파악하는 걸 보면, 그녀는 수학적 재능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자조적으로 말을 꺼냈다."건설적인 자기반성이라고 해줘. 내가 원래 이것저것 잘못을 좀 많이 저지르는 편이야. 조용히 저질러서 크게 티가 안 날 뿐이지."
한유진이 다소 도전적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 단호한 느낌이 서려있었다. "예를 들면 또 다른 건 선배가 뭘 잘못했는데요?"
나는 짧게 침묵하다가 눈앞에 있는 적에게 급습하듯이 대답했다. “사실 난 지수가 죽은 것도 어느 정도는 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말 그대로야 그냥. 그날 내가 하기 귀찮은 일을 지수한테 좀 미뤘거든. 나 대신 그거 하러 가다가 차 사고가 난 거였어.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사고를 일으킨 건 아니지만, 애초에 내가 그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지수가 그 길을 그 시간에 지나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지난 학기 동안 튜터링을 진행하며 한유진과 대면할 때마다 느꼈던 모호하고 불편한 느낌이 드디어 말소리로 변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형태를 갖추고 나온 이유가 뭘까. 카페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슬픈 멜로디의 팝송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한유진이 보여준 이타심 때문일까. 이 말을 내뱉으며 나는 동생이 살아생전 가족들과 있을 때 농담을 하면서 밝게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심장 부근을 무언가로 가볍게 찌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커피잔을 들어 남은 걸 입으로 넣으면서 이번이 몇 번째로 마시는 건지 세는 것에 집중하며 그 느낌을 무시해보려 했다. 정확히 12번째다. 남은 양을 보니 한 번에 다 마실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러면 13번 만에 마시는 게 되어버리니까 두 번에 나눠서 마셔야겠지. 한유진은 이런 와중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약간 슬픈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선배.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선배랑은 아무 상관없는. 그런데 저도 선배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에요."내가 컵에서 눈을 떼고 한유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가 질문을 덧붙였다. "혹시 그때 제가 준 일기장 읽어봤어요?"
"아니. 아직 못 열어봤어."
한유진은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읽어보면 알 테지만, 지수는 선배한테 약간 측은지심 같은 걸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고가 났던 그날, 드디어 오빠가 자기더러 뭘 부탁했다면서 저한테 기쁜 듯이 말하더라고요. 드디어 자기가 오빠의 짐을 덜어줄 기회라도 생긴 것처럼요. 그날 원래 저희는 학교가 끝나고 같이 어딜 가기로 했거든요. 동네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놀러 가자고 했었죠. 그런데 지수가 기뻐하면서 오빠 심부름을 대신하러 가야 한다고, 노는 건 내일 가자고 하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무척 서운했어요. 그래도 저는 그 애를 말릴 수 없었어요. 그 애 얼굴에서 희미하고 희귀한 기쁨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저녁에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 제가 얼마나 저를 원망했을지 예상이 돼요? 내가 친구 간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며 오빠 부탁 따위는 무시하라고 했더라면 그 애는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계속했었어요. 생각도 상상도 다 해봤자 소용없는데 어쩌자는 건지... 저도 선배랑 마찬가지예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역시 나는 내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지수와 한유진은 절친했던 친구 관계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간에 그녀는 동생의 죽음에 나만큼이나 깊게 연관된 사람이었다. 죄책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계속 침묵이 이어지자 한유진은 고개를 돌려서 창밖을 봤다. 눈동자가 창밖의 햇빛을 은은히 받아서 마치 눈물이 차오른 것처럼 촉촉해 보였다. 그녀는 눈으로는 계속 먼 곳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따라 지수가 보고 싶네요."
카페에서 틀어둔 팝송 소리에 묻힐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아마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나에게만은 아주 깊게 박혔다.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지수 납골당에 오기가 힘들었던 거구나."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띤 얼굴이 보였다.
"맞아요. 그런데 3년 정도 지나니까, 한 번도 보러 못 간 게 더 미안해지더라고요. 심부름 가지 말라고 막지도 못했는데 3년이나 얼굴도 안 보여주는 친구라니. 너무 끔찍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