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세는 이유 (12)

by 담결

한유진이 평소와 다름없게 웃으며 자신의 행동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모습은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날 동안 수없이 쌓아온 성일지도 모른다. 내가 짝수에 집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일종의 갑옷을 입는 행위였다. 그것은 나를 다치게 하는 바깥 환경과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입는 보호구였다. 그러나 한유진을 만난 이후에 그 갑옷은 여러 차례 부서졌다. 겉에 덧씌운 것이 부서진 후 생생하게 바라본 풍경은 어땠더라. 지금 내 눈앞에는 죽은 동생을 보고 싶다고 나직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나처럼 마음 한구석에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품고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말했듯, 나 역시 그녀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흔하고 허울 좋은 말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거의 2시간이 넘어가도록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한유진에게 태연하게 다른 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을 늘어놨고, 한유진은 중학교 시절 동생과 있었던 일들을 실없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동안 카페에서 틀어둔 노래는 몇 번이나 장르가 바뀌었다. 내가 커피를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얼음이 먼저 녹았다. 아마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 탓이리라. 나는 18번 만에 모든 음료를 다 마셨다. 지금 컵 안에는 얼음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길게 대화를 나눠도 교수의 스캔들을 없던 일로 만들지 못하고, 죽은 동생을 되살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음료의 양이 줄어드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말이다. 한유진이 시킨 음료까지 바닥을 드러내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왔다. 우리는 다음에 또 보자는 모호한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늘 그렇듯 책상에 먼저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책상 위에 꽂아둔 책과 노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는 내가 작년에 끼워놓은 파란 노트가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 한유진은 내게 그 일기장을 읽어봤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동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중학교 시절의 한유진과 내 동생은 그야말로 평범한 여중생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저 노트 안에도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학생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을 뿐이려나. 노트를 받은 지 세 달 정도나 지났지만, 지금에서야 그런 가벼운 생각이 피어났다. 내가 오늘 한유진이라는 인간의 단편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저걸 읽으면 과거의 내 동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카페에서 마주한 것은 나를 향한 질책이나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저걸 열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강의 노트 사이에 낀 그것을 꺼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일기에는 예상대로 중1 여자애들의 소소한 일상과 큰 의미 없는 잡담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몇 가지는 아까 카페에서 들은 일화이기도 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 도중에, 유독 어떤 날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 날은 나도 기억난다. 아마 내가 중3 기말고사에서 물리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셨던 날이었을 것이다.


[유진아, 중학교고 고등학교고 뭐고 얼른 졸업해서 우리 집을 벗어나고 싶어. 부모님은 어쩌다 가끔 같이 집에 있어도 거의 우리한테 무관심하면서 왜 시험 성적만 나오면 저 난리를 칠까. 오빠도 불쌍해. 이놈의 집구석 진짜 너무 싫어.]


이 대목을 읽으니 한유진이 내가 동생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랬었구나.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을까. 이제서라도 주워 담았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나. 그 뒤로 남은 일기를 모두 다 살펴봤다. 나는 노트를 책상에 그대로 놔둔 채 뭔가에 홀린 듯이 방 밖으로 나가 거실을 가로질러 안쪽에 있는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지수가 죽은 후로 8년 만에 처음 들어와 보는 것 같다. 침대에는 노란색 이불이 가지런히 펴져 있고, 사용감이 거의 없어 푹신해 보이는 배게 옆에는 초등학교 때 유행하던 캐릭터 인형들이 3개 놓여있다. 방 내부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이다. 마치 오늘 밤에 동생이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동생이 아니라, 동생이 죽은 후로 나이를 8살이나 먹어버린 내가 이불이 깔린 침대 위에 눌러앉을 뿐이다. 전등 스위치를 켜지 않았기에 방안은 어둡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에 모든 생각을 멈춘 지금, 내 뺨에서 가늘게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어째서인지 오늘 밤은 계속 이렇게 혼자 고요하게 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한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8년 만에 처음으로 글자수를 세지 않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일기장은 다 읽었어. 정말 고마워.]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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