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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해 Aug 26. 2019

나도 가만히 있어도 될까?

열심히 달려온 자만이 할 수 있는 휴식, 반항

퇴사 후 처음 맞은 월요일. 7시 알림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나도 모르게 번뜩, ‘헉, 지각이다!’ 했던 것이다. 출근할 땐 늦어도 6시엔 일어났으니까. 그러나 곧 ‘아, 나 이제 출근 안 하지?’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시 눈을 뜨니 10시. 잠을 많이 자서 머리가 아팠다. 그동안 부지런하고 성실한 아이로 가면을 썼던 걸까. 이토록 게으른 나인데. 


아무 계획 없이, 대책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어디로 가요?”였다. 내가 다른 회사로 간다고 생각한 듯했다. 어디 안 가요. 놀아요. 아무 계획 없어요. 그 말이 사실이었는데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곧 다시 일할 거라며, “놀아본 사람이 노는 거예요.” 하기도 했다.


놀아보니 그 말이 맞다. 놀아보지 않은 나는 제대로(?) 못 놀고 있다. 나에게 이렇게 자유시간이 생긴 적이 없어서 무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인들에게 추천은 많이 받았다. 한 달 살기를 떠나라,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워라. 할 일도, 목적지도 많이 말해주었다. 가끔은 이런 조언들이 자신의 로망을 대리 실현(?)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로 나름 목록을 만들긴 했는데, 아직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본 드라마 〈멜로가 체질〉 6화에서 임진주(천우희 분)가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극 중 진주는 드라마 작가가 되려고 열심히 달려온 캐릭터다. 공모전에서 탈락한 진주의 원고는 간판 PD 손범수(안재홍 분)의 눈에 띄어 제작을 준비한다. 그러나 편성의 벽에 가로막히고 진주는 소파에 가만히, 정말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문제를 풀기 위한 방법은 더 노력하는 것. 성공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수학적인 답안지가 때로는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노력은 당연한 것. 그 당연한 게 잘 안 되고 그 당연한 게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닌 거구나. 당연한 걸 타고난 어떤 우월한 유전자가 당연한 척 뱉어놓은 말이 아닐까 의심이 들 때 가만히 있어본다. (중략) 노력해서 얻은 게 이 정도뿐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듯이 가만히 있는데 예상치 못한 명품가방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죠. 어차피 이상한 세상인데 한 번쯤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 이것이 저의 오늘에겐 마땅한 명분입니다.*


극 중 진주의 ‘가만히’는 열심히 달려온 자만이 할 수 있는 휴식, 열심히 달려온 자만이 할 수 있는 반항. 그런 느낌이었다. 나도 진주처럼 가만히 있어도 될까?


아직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하던 일을 해야겠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고 감사일기를 쓰는 일. 이 일들로 무언가 달성하겠다, 결과물을 만들어내겠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무언가 해냈다는 마음일 뿐.





*출처_ 대사는 아래 블로그에서 찾았다.
https://iamninakim.blog.me/221627798969

**이미지는 〈멜로가 체질〉공식 홈페이지 ‘포토갤러리’에서 가져왔다.

http://tv.jtbc.joins.com/photo/pr10011072/pm10053955/detail/1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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