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로 회사를 나가는 주제에, 감상에 젖었다.
‘우리’라는 말을 좋아했다. 영어로는 my를 써야 할 그 자리에 ‘우리’를 써넣는 게 좋았다. 내 것을 고집하기보다 함께 나누는 것 같아서. 그런 정서가 밴 듯해서.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동네, 우리 모임.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데 막상 울타리를 떠나야 하는 입장이 되니 그 말이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이 집단에서 나는 이제 ‘우리’로 묶이지 않겠구나. 내가 말한 그 많은 ‘우리’ 속에 ‘경계 긋기’가 함께하고 있음을 우리 밖으로 나가는 이 순간 깨달았다. 그 안에 있을 땐 몰랐다. 우리 밖 사람에게 이 말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내 발로 회사를 나가는 주제에, 감상에 젖었다. 나를 보내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마음이 있듯 떠나는 나도 그렇다. 미우나 고우나 햇수로 4년을 일한 회사니까. 어차피 나갈 사람 하루빨리 내보낸다는 듯한 분위기도 조금은 상처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고, 일주일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고, 한 달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로 묶을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가장 아쉬운 건, 월급...이지만 일단 그 문제는 제쳐두고. 출근길에 어디까지 왔냐고 물어보는 일. 졸릴 때 같이 카페에 들러 사는 커피 한 잔. 탕비실에서의 수다 한 판. 아까 낮에 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특권. 내가 받은 업무 스트레스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눈치.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할 수 있던 많은 일들이 아쉽다. 정확히는 내 하루의 소소한 순간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게 아쉽다.
아마도 이 아쉬움은 다음 주면 두려움이 될지 모른다. 정해 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우리 밖으로 나가는 나,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답 역시 일단은 나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하며 답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