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나무 시리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나는 제자리에 멈춰있어 시간을 놓치는 것만 같은 날. 남들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데 나만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은 날. 세상이 나를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만 같은 날.
그럴 때면 나무를 보러 간다. 어느 날은 가까운 마을 앞 나무로, 어느 날은 비자림으로 또 치유의 숲으로. 습기를 머금은 땅을 밟고 밟아 비로소 나무 앞에 다다른다. 울타리처럼 일렬로 서있는 도시의 나무들과 달리 제주의 나무들은 하늘과 연결된 땅의 주인처럼 우직하게 서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또 앞으로 살아갈 날들보다 오래도록, 영겁의 시간을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듯한 나무를 보면 땅에서부터 발을 타고 머릿속, 또 손끝까지 위로가 스며든다.
지금 이 순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나무가 성장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순간에는 알아채지 못하지만, 나무는 매 순간 자라나고 있다. 그저 나무를 잊고 매일을 살다 보면 문득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하고 과거를 뒤돌아봐야 할 만큼 자라 있는 나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나와 달리 매일이 별일 없어 보이지만 나무는 매 순간 단단히 서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사실을 느끼고 나면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평화로움이 얼마나 숨 가쁜지 깨닫게 된다. 치열하게 평화를 유지하는 존재들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나무를 보면 내 안에도 나무가 자란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이제 무언가가 된다. 나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