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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Apr 27. 2020

첫 만남의 기억

8년이 지나도 아내를 처음 본 순간은, 눈에 선하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건 꽤나 낭만적인일이다. 만날 당시에는 그 만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결국 어떤 곳에 가 닿을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아직 끝이 써져있지 않은 이야기책을 처음 받아 든 아이가 된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몇 장 더 펼쳐서 뒤의 이야기를 읽을지 아니면 그만두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2012년 1월의 겨울, 아내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나는 아직까지도 꽤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게의 첫 만남이 그렇듯이 나는 그때, 8년 후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지간한 상상력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한참 뒤의 미래를 그려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얼마 전 2월 22일은 내가 지금의 아내를 여자 친구로 부를 수 있게 된 날이었다. 마침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매년 이 날만 되면 나는 우리가 만났던 처음의 순간을, 운명도 무엇도 아니었을 그 우연의 시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6개월간의 미국 교환학생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처음 만났다. 만남은 상호 간의 약속을 전제로 하니 처음 보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시베리아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이제 막 한국으로 돌아온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세차게 반겨주는 그런 겨울이었다. 그때의 내 관심사는 온통 영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개월의 시간 동안 겨우 익숙해진 영어가 금세 또 불편해질까, 나는 영어에 도움이 될 만한 스터디를 찾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신촌 어느 카페에서 진행되는 영어 소모임을 알게 되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체계적인 커리큘럼도 없이 진행되는 정체를 알 수 없이 이상한 모임이었다. 그 이상한 곳에서 나는 아내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여전히 영어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내 영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모임에 나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카페에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고 파란 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는 그중 하나였다. 나는 그 여자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렇게 얼굴이 하얀 여자를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가끔씩 아내는 그때의 나를 두고 놀리듯 이야기한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누구라도 신경 쓰이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절로 나타나는 행동도 있는 법이다. 마치 뜨거운 것을 만지게 되면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는 것처럼 조건 없이 행해지는 행동이 있다. 나는 그때의 내 시선 역시 그런 종류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변명이라도 하고 나면 민망한 마음이 조금 덜어지는 것이었다.

 2020년 2월 22일, 이미 결혼한 부부가 기념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날, 우리는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념일을 축하하지 않았다. 대신 연애 시절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함께 꺼내보았다. 핸드폰에는 8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찍은 사진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나는 사진들을 훑어 보며 좋은 인연이란 이렇게 뒤돌아 보며 그간의 족적들을 들춰볼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첫 만남을 기억하게 하고, 그 우연의 시간을 운명으로 믿게 하며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점들이 아니라 하나의 선처럼 이어져 완성된 이야기처럼 들리게 만들어주는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좋은 인연의 증표라고 여긴다.


Image by rabiits_for_carr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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