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축사
아빠의 칠순을 축하합니다.
요즘 들어,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별 탈 없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평소 책 한 권 읽지 않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아빠는 편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아빠를 위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축사를 씁니다.
70년이란 얼마나 길고도 아득한 세월입니까. 한국 전쟁이 끝난 때가 1953년, 아빠가 태어나기 불과 1년 전의 일입니다.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70년의 시간을 살아온 기분이 어떨지, 이제 고작 37년을 산 저는 도무지 상상할 길이 없습니다.
아빠의 지난 시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이런 말을 떠올렸습니다.
최선을 다한 인생.
저는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자.
사실, 이 말은 우리 가족의 가훈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족 소개서’를 작성해서 학교에 제출하던 때가 있었는데요. 큼지막한 가족사진을 제일 위에 붙이고, 그 아래 가훈과 가족 구성원 소개를 적는 식이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아빠의 주도 하에, 아빠는 만능 스포츠맨, 엄마는 우리를 사랑하고 요리를 잘하는 주부, 저와 이기종은 축구 혹은 태권도를 잘하는, 검사가 되고 싶은 어린이라고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보다 기억나는 건 가훈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사실 저는 가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당연하고 평범해 왠지 멋없게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무엇에 최선을 다하자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차라리 다른 친구들의 가화만사성 같은 문구가 더 괜찮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저 역시 그때의 아빠 나이를 향해 가다 보니, 이제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아빠는 가훈처럼, 가족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 요령 피우지 않는 사람, 게으름이라곤 모르는 사람. 엄마는 자주 우리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빠였지만, 성실함 하나를 믿고 결혼했다고. 그것 하난 정말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아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여러 일화 중 저는 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4, 5학년 시절, 스키장에 처음 놀러 갔던 날이었을 겁니다.
스키장이 어떤 곳인지, 리프트는 뭔지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 가족은 타지도 않은 리프트 권을 끊어 장식처럼 자랑스레 목에 걸고는, 정식 스키 코스도 아닌 연습용으로 마련된 작은 언덕 같은 곳에서 스키를 즐겼었습니다. 리프트는커녕 계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 정상에서 한번 슈욱 하고 내려오면 스키를 등에 업고 언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습니다. 처음 타보는 스키라 정말 즐거웠지만 십 초를 내려오면 체감상 일 이분을 다시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 어렸던 저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지친 기색도 없이 저와 이기종의 스키까지 어깨에 지고는 그 힘든 언덕을 뚜벅뚜벅 몇 번이고 우직하게 올라갔더랬습니다. 덕분에 몇 시간이나 볼이 빨개지도록 즐겁게 스키를 탈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놀았던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져 잠만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제게 보여주었던 그 뒷모습, 무거운 짐을 지고 불평 하나 없이 묵묵히 작은 언덕을 몇 번이나 지치지 않고 오르던 장면이 오래도록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요. 목욕탕에서 아플 만큼 때를 밀어주던 아빠, 산을 내려오다 길을 잃는 바람에 함께 헤매던 아빠, 라면과 짜파게티를 한데 섞어 끓인 이상한 요리를 해주던 아빠. 여러 재미있는 추억도 많지만, 저는 그때 그 모습이야 말로 가장 아빠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남편으로서, 또 아빠로서 정말 최선을 다한 70년이었습니다.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 하나만큼은 최고로 세련됐던 아빠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맙고 사랑한단 말을 전합니다.
엄마는 매번 촌스럽다 투덜대지만, 아빠의 무던하고 투박한 성격이 제게 큰 위안이 되었단 사실을 아빠는 아마 알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큰 일이라도 아빠에게 가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저는 그게 참 좋았습니다. 특히 재이가 태어났을 때 말입니다.
세상엔 정상인 아이라도 불행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오히려 재이로 인해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전혀 문제없다.
아빠가 제게 해준 그 말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저는 최선을 다해 행복하려 합니다.
그러니 아빠. 아빠도 이제 앞으로의 시간은 아무쪼록 가족이 아닌 본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 다는 건 결국, 본인의 건강을 챙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충분히 쉬며 즐긴다는 것 아닐까요. 만능스포츠맨인 아빠라도 세상에 운동 말고 다른 재미도 있다는 걸 꼭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아빠. 지난 70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부디 지난 인생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꿈을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습니까.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외제차를 끌고, 자식 두 명을 모두 좋은 대학에 보낸 이범수 씨. 다시 한번 70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우리, 다 같이 행복합시다.
- 이제는 아빠가 된 둘째 아들이, 존경과 사랑을 담아
202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