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의 2막을 마무리하며
산토리니에서 나의 마지막 여행지인 아테네로 이동하는 날.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에 일어나 짐정리 한 뒤 체크아웃 하고, 남은 시간 동안 피라 마을을 더 둘러볼까 싶다가 더운 날씨에 굳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근처 식당에 들어가 오전부터 오징어 튀김에 맥주 한 잔 시켜두고 시간을 보냈다. 오징어 튀김은 크로아티아 때와 달리 퀄리티도 별로인 데다 그다지 싼 편도 아니라 썩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휴양지 식당의 따듯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참 좋았다.
그 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일기와 또 어느샌가 쌓여버린 업무처리를 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건 참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데, 비록 쉬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일이 여행에 집중하는 시간을 흐리게 만들 때도 있으나 이렇게 혼자서 시간이 남을 때는 뭐든 할 일이 있기에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누군가와 같이 하는 여행이면 힘들 순 있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즐기다가 다시 돌아간 산토리니 공항.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라 체크인까지 큰 시간이 소요되지 않아 별 탈 없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산토리니에서 아테네로 도착하는 비행시간보다 아테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이아 마을의 일정을 함께 했던 여행자 G와 이곳 아테네에서 또 한 번 만나기로 했는데,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정도였지만 수속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확실히 여행의 막바지라 그런지 이번 여행지 자체에는 기대가 덜하긴 했다. 산토리니와는 달리 아테네는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을뿐더러, G와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에는 이곳의 유명 스팟인 리카비토스 언덕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야경 구경도 했지만 보이는 풍경이 좋았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어수선한 곳이라 썩 마음에 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껏 다녔던 모든 여행지중 아테네의 밤은 왠지 모르게 특히 경계되더라. 해외에서 오래 거주하기도 했던 데다 다양한 여행지를 다녔던 경험이 있는 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는 걸 몸소 체감했던 도시는 크게 없는 편인데, 이곳은 확실히 나 스스로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뭔가 느껴지는 게 그랬던 만큼 유럽 지역에서 짧지 않게 산 나의 감을 믿기로 하고 숙소에 늦지 않게 들어갔다.
아테네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다음 날, 침대에 누워 오늘은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도심 산책이나 가볍게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곳의 랜드마크인 아크로폴리스를 다녀올까 싶었지만 이번 여행에선 그조차 가지 않기로 했는데, 아테네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유적지를 그냥 넘겨도 될까 싶긴 했으나 전 날 언덕 위에서 야경 볼 때 이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담았던 데다 굳이 그 긴 줄을 오래 기다려서 구석구석까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내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아크로폴리스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스플리트에서 이번 여행의 마무리를 결정한 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이 들더라. 더 이상의 경험과 생각은 오히려 포화되어 흘러넘쳐버리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을뿐더러 슬슬 여행에 지쳐가는 내 모습이 보이기도 했던 터라..
아테네의 관광은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터라 어디 한 군데를 정해두지 않은 채 돌아다녔는데, 그래도 나름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너무 맛있는 점심 식사도 하고 적당한 날씨에 올드타운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발견한 카페에서 간단히 커피 한 잔 마시고, 아크로폴리스가 보이는 루프탑 식당에서 좋은 경치를 마주하며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 그렇게 내 여행의 마지막 날은 약간은 밋밋하면서도 담백하게 마무리되었다.
나의 여행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아무 일정도 없이 도착했지만 시작부터 너무나 좋았던 튀르키예.
여행자 A를 만나 갑작스럽게 방문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조지아.
A와 함께 계획한 일정을 다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튀르키예에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뒤, 휴식이 필요해 방문했던 헝가리.
그저 경유지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내게 많은 생각의 변화를 주었던 오스트리아.
추워지는 날씨로 인해 급히 여정을 바꾸게 되었지만 나름의 상반된 포근함을 주었던 폴란드.
따듯함과 행복함에 여행 그 자체를 즐겼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
여행의 막바지에 약간은 지쳤지만 마지막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그리스까지.
순탄하게 흘러간 여행지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동선도 최악인 데다 계획이라곤 단 하나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 곳들이지만, 모든 여행지가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깊이 박힐 거라 확신할 정도로 큰 위안을 준 곳들이다. 이 여행들은 나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고,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가도 다시 한번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행의 마지막에 있어서 남기고 싶은 말이 이것저것 너무나 많지만, 감상은 조금 더 미루어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내게는 익숙하면서도 정든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해 있겠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부터 그녀에 대한 생각을 대부분 떨쳐낸 상태로 여행을 지속했지만, 함께했던 추억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방문하면 지금껏 이겨냈다고 생각한 나의 여정에 또 새로운 시련이 될 것이다.
내 마지막 여정은 열흘가량의 파리에서 보내는 날들과, 우리가 만났던 스페인의 그 도시에서 보내는 사흘. 분명 그곳들은 또 버거운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물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처음 그 생각을 가졌던 이후로 그 장소들을 마주했을 때의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만큼 그곳에서 보내게 될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될 그녀와의 추억이다.
에펠탑 앞에서 했던 고백은 뚜렷이 기억나는 일인 만큼 감당할 수 있다. 루브르와 오르세를 방문했던 시간 모두 뚜렷이 기억나는 만큼 감당할 수 있다. 함께 갔던 식당과 즐거웠던 곳은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에서 나눈 소소한 대화들이 문득 생각이 나버렸을 때, 흐려져있던 기억 속 어딘가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추억을 갑작스레 마주하였을 때, 과연 내가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여행은 마무리되었을지 몰라도 아직 나의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곳을 직접 가기 전까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남은 파리에서의 시간도 잘 보내다 가자.
스페인의 그 도시에서도 잘 보내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