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의 설렘을 안은 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그리스의 산토리니로 이동하는 날.
본래 첫 여행지였던 튀르키예의 일정이 끝나고 난 뒤 방문하려고 예정했던 나라였지만, 어쩌다 보니 돌고 돌아 나의 마지막 여행지가 되었다. 사실 헝가리로 올라가면서부터 그리스 여행은 마음을 접어둔 상태였는데 결국 어떻게든 오긴 왔구나.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내 여행의 동선이 중구난방으로 최악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비행시간이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았던 터라 나름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섰다. 원래는 두브로브니크 공항까지 버스 타고 가려다가 내가 머무는 숙소와 공항버스 정류장 거리가 꽤 되는 만큼 무거운 짐 들고 또 바리바리 이동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아 고민 없이 택시를 탔다. 물론 30분 이동에 약 4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 걸 확인했을 땐 그토록 물가가 저렴했던 조지아가 그리워졌지만.
일단 아테네 공항으로 이동 한 뒤 한 시간 정도의 대기시간을 거쳐 자가환승해야 했는데, 그래도 이번 이동은 엄청나게 긴 이동시간이라거나 대기시간, 혹은 크나큰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산토리니는 크게 피라, 이아라는 마을로 나뉘며 내가 가야 할 곳은 그 유명한 흰색 바탕의 건물에 푸른 지붕의 교회가 있는 이아마을이었다. 이아는 일단 피라에 도착한 후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그 과정이 귀찮게 느껴져서 그냥 택시 타버릴까 하다가 이미 두브로브니크에서 택시로 큰 지출을 했던 데다 겨우 20분 타고 가는데 약 5만 원 정도의 비용인 걸 확인하고 깔끔히 포기한 채 버스 타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버스 노선이 나름 잘 되어있는데다 운 좋게 시간대도 잘 맞춰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숙소에 체크인 한 뒤 방에 짐 던져두고, 간단히 씻은 다음 시내 구경하러 바로 나왔다. 내가 기대했던 산토리니는 흰색 건물들과 파란 지붕들이 되게 조화롭게 있는 곳이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파란 지붕이 있는 건물은 거의 없었다. 알고 보니 몇몇 스팟에만 존재하고 지붕 자체가 거의 없더라? 물론 아름다운 도시지만, 잘 알아보지도 않고 기대감만 부풀었던 내 상상 속의 산토리니는 현실과 꽤 달랐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딱 봐도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제는 딱히 씁쓸하거나 한 감정이 들진 않지만, 어쩌다 보니 이런 곳을 용케 혼자 왔네 싶긴 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부터 느꼈는데 여행이 마무리되어 갈수록 신혼 여행지로 유명한 휴양 도시들을 방문하는 비율이 많아진 것 같더라. 그러다 보니 혼자서 이런 재미있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나의 여행은 더 이상 이별이 만들어준 세계여행이 아니라, 혼자 하는 신혼여행 사전 답사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다음번에 함께 올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다닌 곳들을 소개해주자.'
다만 소신발언을 하나 하자면, 솔직히 산토리니는 신혼여행지로 약간 모자란 느낌이었다. 예쁘긴 한데 너무 일정 스팟만 조성해 둔 느낌이라 크게 볼 건 없는 느낌? 물론 이아 마을 말고도 다른 좋은 장소가 많은 건 알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원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산토리니는 신혼여행지에서 제외해야지! 물론 미래에 결혼한다는 사람이 가고 싶다 하면 데려가 줄 수밖에 없겠지만.
저녁에는 식사 겸 사진 동행으로 만난,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동행인 G와 함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폴란드에서 2년간 근무하며 살다가 최근에 퇴사한 뒤 여행 다니고 있다는데, 나도 이런저런 곳을 많이 다녀봤지만 G도 꽤나 여행을 좋아하는구나 싶을 만큼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여정을 마친 뒤엔 아프리카 여행을 두 달 정도 갈 예정이라던데 나도 겉핥기식으로만 경험해 봤던 어려운 여행지를 그렇게 혼자 계획하고 가는 게 대단하다 싶더라. 둘 다 외향적인 성격인 만큼 빨리 친해져서 그런지 그는 내게 아프리카 동행을 권했는데, 솔직히 약간 혹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 이번 여행의 마무리는 이미 스플리트에서 모두 정해졌기에 아쉽게 거절했다.
식사 후 G는 피곤함에 숙소로 복귀하고, 나는 이곳의 야경을 보며 산책 좀 하려 거닐었다. 세계적인 관광지긴 하지만 성수기를 벗어나서 그런지 사람이 정말 없는 편이더라. 물론 밤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사람이 없었다.
둘러보면서도 역시 산토리니에서의 2박 3일은 짧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어. 무계획 여행에 이 정도의 행복감을 갖고 있으면 대 만족이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나는 분명 또 다음 여행을 떠날 사람이니까 이번 여행은 이대로 괜찮아.
다음 날 아침, 이제는 내 여행기에 있어 빼먹을 수 없는 그 일정. 이곳에서도 역시 일출을 보러 다녀왔다. 피곤하긴 하지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따듯한 감정이 든다. 생각해 보니 이번 여행은 이렇게 일출을 많이 보러 다니면서, 프랑스에 그렇게 오래 살 때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아무래도 이번에 방문하면 처음으로 시도해볼까 싶다.
어제 야간산책하면서 봐두었던 스팟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는 걸 구경했다. 일출의 매력이 바로 이거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예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튀르키예에서도, 조지아에서도, 헝가리 혹은 크로아티아에서도 늘 좋았다.
다만 내가 일출을 보려고 점찍어둔 장소는 알고 보니 유명한 촬영 스팟이었나 보더라? 도착했을 당시 아무도 없길래 혼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인기척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뜻하진 않았지만 가장 좋은 위치에서 미동도 없이 오랜 시간 있던 게 미안해서 얼른 비켜주었다.
일출을 보고 난 후엔 이아 마을에서의 짧은 하루 일정을 마무리 한 뒤 G와 합류하여 피라 마을로 이동했다. 다만 피라는 이아에 비해 정말 밋밋한 도시였는데, 교통의 요지인 건 좋지만 이아를 먼저 들렀다 온 입장으로선 그다지 매력 있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딱 봐도 할 게 없겠다 싶었던 나와 G는 우리끼리 놀자 싶어서 식당으로 들어가 대낮부터 술이나 왕창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가벼운 산책 좀 하다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한 뒤 내 숙소에 있는 수영장으로 가서 발 담그고 놀았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G는 오늘 산토리니를 아웃하는 일정이었기에 공항으로 떠났고, 혼자서 특별히 뭐 해볼까 하던 나는 다 귀찮아져서 숙소에서 푹 쉬었다. 대신 여행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만큼 한국의 친구들, 가족들과 전화하며 혼자만의 소소하고 기쁜 시간을 보냈다.
즐거웠다! 내 기준에 신혼 여행지는 아니었을지언정, 단순히 휴양지로서도 정말 즐거운 곳이었다. 내 여행에는 더 이상 이별의 슬픔도, 아쉬움도 없다. 이렇게 좋은 곳들을 다니며, 다음번에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리라 벅찬 설렘만 가슴에 남아있을 뿐이다.
아름다웠던 산토리니, 다시 마주 할 땐 누군가의 손을 맞잡은 채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