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빗방울 소리에 떠오른 기억
야간 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이동하는 길.
좌석도 혼자 쓰는 데다 7시간 정도의 거리인 만큼 원래대로라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여정이었겠지만, 이번 이동은 거의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며 제대로 쉬지도 못해 결국 피곤에 절은 채 겨우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오전 7시 30분쯤 도착 예정이었으나 막상 도착하니 6시 언저리였다. 무려 한 시간 반 정도를 일찍 도착한 건데, 유럽 지역에 살아오며 경험했던 수많은 대중교통이 지연되고 취소되는 건 흔한 경우였지만 빨리 도착하는 건 이번이 난생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숙소 체크인이 오후 1시라 외부에서 시간 죽여야 해서 특히 필요도 없는 오늘 같은 날..
예상은 했지만 내리자마자 찬 공기가 확 다가왔다. 한창 더웠던 초반의 여행지와는 달리 헝가리, 오스트리아에서도 조금씩 쌀쌀해지고 있는 걸 느낀 데다 이곳은 아무래도 북유럽의 초입이라 그런지, 아니면 순전히 내 기분의 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싸늘해진 바람에 더욱 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숙소 체크인까지는 무려 7시간 정도가 남은 상황. 버스를 타고 이동한만큼의 시간만큼을 외부에서 보내야 하는 건데, 이른 아침인터라 열려있는 식당도 없어 결국 터미널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 이 비어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자 그동안의 여행기를 정리하고 업무 좀 보려 했는데, 아무리 피곤한 상황이어도 보통 한번 잠이 깨고 나면 다시 잠들지 않는 나 역시 여독이 꽤나 쌓인 건지 미친 듯이 피곤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짐은 대충 옆에 둔 채 테이블에 엎드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누가 가져가기야 하겠어? 그리고 가져갈 거면 가져가라지, 어차피 든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으로 잠시 누워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수많은 인기척에 눈을 뜨니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있더라. 처음 방문한 곳의 아무 데서나 널브러져 있었음에도 이렇게 푹 잤다는 느낌을 받은 건 난생처음이었는데 많이 피곤하긴 했었나 보네. 이후에는 적당히 일과 여행기를 정리하며 시간 보내다가, 낮 12시쯤 돼서 간단히 동네를 돌아보며 약간의 식료품을 구매한 뒤 무사히 숙소에 체크인했다.
크라쿠프에서는 에어비앤비를 잡았는데, 맨 꼭대기층이라 보이는 풍경이 정말 예뻤다! 천장에 붙어있는 창문이 제일 마음에 들었고, 인테리어도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이라 짧은 2박 3일의 일정동안 푹 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짐을 푼 뒤, 도착 전 미리 잡아둔 동행을 만나러 올드타운에 있는 바벨성으로 향했다. 비엔나에서야 C와는 우연히 만난 인연이라 쳐도, 새로운 동행과 약속을 잡고 1대 1로 만나는 건 튀르키예 이후로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만난 여행자 D는 차분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전체적으로 나긋나긋한 성향이었는데, 그렇다고 낯을 가린다는 느낌은 아니라 금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동행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전혀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 혼자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작은 도시지만 나름 관광 구역도 확실히 나눠져 있는 이곳은 돌아다니다 보니 프랑스의 한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의 느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비록 날씨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데다 바람도 꽤나 거세 돌아다니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이런 분위기조차 그곳의 겨울 풍경과 겹쳐질 뿐이었다.
그 후엔 유명 스팟들을 적당히 돌아다니다 D가 미리 알아본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며 대화 나누기로 했는데, 그 카페의 인테리어가 정말 취향 저격이었다. 흔히 한국에서 놀림거리로 많이 표현되는 '요즘 감성카페' 느낌, 고인돌 그 자체인 인테리어에 이런 카페가 정말 실존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렇게도 장사가 된다는 게 너무 웃음 포인트였다. 이렇게 극찬을 하면 마치 비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런 감정 하나 없이 정말 순수하게 너무 재밌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황량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나름 바람막이도 잘 설치해 두어 생각보다 춥지도 않았던 데다, 마치 새벽 시간 편의점 앞 진실의 의자처럼 얘기가 술술 나오는 마법 같은 장소였다. 비록 오늘 도착해서 고작 몇 군데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이곳이 내 크라쿠프 최고의 스팟으로 기억될 듯!
카페에서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점점 해가 지기도 하고 슬슬 배도 고파오기에 간단히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폴란드 전통식인 장조림 형태의 음식과 양배추 고기말이었는데 맛은 꽤 괜찮았다. 생각보다 너무 익숙한 맛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동유럽 음식들이 대체적으로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듯한 데다 지금까지 다녔던 나라들 중 현지 맥주가 가장 맛있던 것도 마음에 드는 요소였다.
식사를 마친 뒤엔 아주 조금씩 부슬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밤에는 바람이 꽤나 잔잔해진 터라 오히려 산책하기 적당할 듯하여 D와 함께 강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산책은 무참히 실패했는데, 고요했던 도심과는 달리 강가에 근접할수록 마치 태풍처럼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힘들 만큼 바람이 점점 심해지더라. 도시가 아기자기하니 예뻐서 천천히 밤길을 거닐면 좋을 것 같았는데 날씨가 너무 별로라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비엔나에서부터 야간버스를 타고 온 후 바로 시작한 하루의 일정이 너무 피곤했기도 하고, 작은 도시인만큼 대부분의 관광지를 오늘 모두 둘러보았기에 D 와는 적당히 시간을 보낸 뒤 일찍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에 D가 집에 가는 길을 같이 동행해 주었는데, 다행히 그와 동행한 덕분에 숙소의 문이 말썽이라 잘 열지 못하는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 유럽 오면 문으로 인해 난처한 경험은 모두가 가지는 해프닝이지. 물론 나 역시 그랬고 말이야.
오늘 도착한 크라쿠프! 사실 내가 지금까지 다닌 수많은 여행지와 마찬가지로, 이런 곳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데다 올 생각도 전혀 없던 곳이었다. 바르샤바를 올라가기 위한 경유지 중 한 곳으로 눈에 띈 데다 이미 다녀갔던 여행객들의 후기를 읽어보아도 꽤나 괜찮아 보이길래 방문했는데, 사실 개인적으론 타 여행객들의 후한 평에 비해 그다지 인상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이런저런 생각 없이 여행이 여행으로서 즐거웠던 오늘이다. 좋은 인상의 여행자 D, 맛있었던 식사, 웃음을 안겨준 카페까지. 오늘의 소소한 것들은 꽤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마친 뒤 조용히 누워본 침대,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는지 맨 꼭대기층인 내 숙소 바로 위에 있는 지붕을 타닥타닥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더라. 내가 파리에서 혼자 살던 집도 이랬다.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좋아했고, 비가 오는 날은 밤이 되면 그 소리에 왠지 모를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이 작은 빗소리가 내게 잔잔하면서도 소중했던 향수를 불러일으켜주는구나.
이 날은 밤새 타닥거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아주 푹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