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아무런 일정도 없이 온전하게 홀로 보내는 날.
딱히 적어나갈 내용도 없다. 크라쿠프에 있을 때도 바르샤바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훑고 왔지만 한 번쯤 가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곳이 전혀 없더라. 그래서 이번 바르샤바에서의 목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였다.
아침은 어제 간단히 사온 샌드위치와 과일주스를 먹으며 밀린 업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전에도 한번 스친 생각이지만 일 때문이라도 이 여행을 생각보다 오래 지속할 순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온라인으로 하는 업무인만큼 공간의 제약이 적은 편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적은 편'일뿐 아예 없는 건 아니기에 점점 업무 처리에 애로사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정확한 귀국 일정을 짜봐야겠어.
비엔나에서 보냈던 날 이후로, 생각을 크게 비운 채 이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보이는 건 있는 그대로 보고, 좋은 건 있는 그대로 좋다 느낀다. 그래도 아직까진 혼자 있으면 약간 우울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 좋아하는 노래 켜두고 푹 쉬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 바르샤바에서 있는 유일한 하루를 아무런 구경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게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조금 들긴 했지만 늘 생각했듯 내가 다른 여행자들 다 즐기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식사도 굳이 외출해서 식당 이리저리 찾아다니기 싫어서 우버로 배달시켰다. 오래간만에 국물 요리가 먹고 싶어서 일식으로 라멘과 초밥 구성의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는데, 유럽에서 판매하는 일식이 다 그렇듯 큰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격이 저렴한 건 큰 메리트였다. 아마 똑같은 양으로 파리에서 시켰다면 같은 퀄리티에 최소 5만 원은 나왔을 텐데, 여기는 2~3만 원 정도밖에 안 하더라. 이 정도면 시켜 먹을 만 하지!
다만 카드 결제가 안된다는 건 꽤 불편한 요소였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이번 여행에서 카드 결제를 받아주지 않은 국가는 꽤 여러 곳 있었는데, 심지어 각국의 통화가 다른만큼 이 점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더라. 나중에 또 새로운 여행을 간다면 적어도 이 부분은 제대로 알아보고 다녀야 할 듯싶었다.
결국 배달부와 함께 숙소 밑에 있는 ATM까지 같이 내려가서 현금으로 인출한 뒤 건네주는 번거로운 방식으로 결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점심 겸 저녁식사를 마무리 한 뒤, 그래도 도시 한 번쯤은 가볍게 둘러봐야겠다 싶어서 설렁설렁 씻고 준비한 뒤 산책 나갔다. 지금까지 늘 별로였던 크라쿠프에서의 날씨와는 달리 오늘은 꽤 맑은 데다 마침 걸어서 30분 정도의 위치에 강이 크게 흐르길래 강가 따라서 산책하며 노을 보면 예쁠 것 같아 그쪽으로 향했다.
바르샤바의 인상은 유럽치고 꽤나 현대적인 느낌이 강해서 개인적으론 이곳의 건물 양식이 크게 와닿진 않더라. 게다가 아직 10월이었음에도 나를 제외한 모든 현지인이 벌써부터 패딩을 입고 다니는 데다 날씨의 영향인지 거리 자체에서 느껴지는 휑한 분위기로 인해 북유럽을 더 치고 올라가지 않기로 결정한 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바르샤바는 아무 목적 없이 방문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유일하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만 판매한다고 하는 '핫비어'라는 걸 마셔보는 것. 뱅쇼나 사케처럼 따듯하게 먹는 술 종류가 몇 개 있긴 하지만, 핫 비어라는 개념은 완전히 처음 듣는 거라 꼭 시도해보고 싶었다.
바르샤바 내에서도 많이 파는 게 아닌 터라 올드 타운 근처에 있는 식당 한 군데에서 판매하는걸 겨우 발견했다. 식사 메뉴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은 채 오로지 핫비어 하나만 주문한 뒤 5분 정도 기다리고 나서야 기대하던 그 음료를 마주할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시나몬 가루가 들어가긴 했지만 시나몬과 오렌지, 그리고 팔각등의 향신료 몇 가지가 포함되어 구성자체는 뱅쇼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맥주맛이 감돌면서 뱅쇼와 비슷한 결이기도 하고, 뜨거운데도 탄산감이 아주 적게나마 남아있는 느낌이 꽤나 나쁘지 않았다. 다른 여행객이 적어둔 후기는 별로 맛없다고 했는데 나한텐 그 정도는 아니더라. 겨울 되면 한 번씩은 생각날 것 같은 맛? 나름 괜찮은 시도였다!
원래대로라면 산책을 마친 후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핫비어 덕분에 몸이 꽤나 후끈해진 터라 마찬가지로 30분 정도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숙소까지 이동하며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유선상으로 간단히 업무 회의를 했는데, 여행을 떠나오기 전 의욕도 없고 하기 싫던 그때의 내 모습과는 달리 점점 하고 싶은 것들도 생기고 무엇보다 의욕이 점점 돌기 시작했다. 일하는 도중에도 이렇게 변하고 있는 스스로가 체감되는 게 참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돌아온 뒤에는,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해야하기에 미리 짐을 다 싸두고 하루를 일찍 마무리했다.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바르샤바. 북유럽을 통하는 경유지 정도로만 생각한 데다, 실제로 내게 있어서 그다지 크게 와닿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혼자 두기에 더욱 적합한 곳이었다고도 생각해. 비록 이번에는 이 나라를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떠나지만, 더 이상 혼자 다니는 게 조금의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려준 고마운 곳이다.
한 국가, 한 도시가 마무리되어 갈 때마다 점점 변화하고 있는 나 스스로를 체감하며, 폴란드의 여정도 이렇게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