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아 Mar 14. 2024

말라가, 이곳은 네 말라가였구나

우엘린 해변에 혼자 앉아서

말라가에서 보내는 두 번째 날,


여정이 피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 날 펑펑 울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간에 정말 잘 자고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업무를 확인하니 기쁘게도 주문이 정말 많이 들어와 있었다. 여행도 슬슬 마무리되는 만큼 이젠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인가? 한국 가면 다시 나 스스로에게 몰두하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간단히 나갈 준비를 마친 후 창문을 열었는데, 바로 앞에 빨랫줄이 걸려 있더라. 맞아, 말라가는 집의 창문마다 이렇게 빨랫줄이 있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늘 그 밑을 보는 걸 무서워했었고, 어느 날은 결국 옷을 떨어트려 잃어버리기도 했었지.



늘 이런 게 문제다. 같이 다녔던 길과 관광지, 식당은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나름 담담히 받아들일만했으나 불현듯 떠오르는 잊고 지낸 추억들이 다가오는 건 참 쉽지 않다.


그때는 그런 그녀를 놀렸었는데, 이번에 나도 같은 입장이 돼서 창문 밑을 바라보니까 무섭더라.




딱히 관광을 하기 위해 방문한 도시는 아닌 말라가, 오늘 하루의 시작은 이곳의 가장 큰 역인 잠브라노 역을 다녀왔다.


앞쪽에 쭉 서있는 오토바이들을 보며 스쳤던 기억. 그녀는 한 글자씩 말하는 ‘탕수육’ 게임을 참 못했다. 하다못해 ‘오토바이’는 네 글자라 둘이서 같은 단어만 계속 반복하면 되는데도 그거조차 못했다. 바보 같지만 귀여웠지.



역 바로 앞쪽엔 버스 터미널이 있다. 내가 그라나다로 떠나는 길을 배웅해 주기 위해 함께 방문했던 곳. 나는 그곳에서 작별 포옹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인사법이 흔하니까.'라는 제스처로 쉽게 포옹했지만, 사실은 한번 안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머물던 호텔 앞 우리가 처음 만났던 길. 검은색 원피스와 분홍 가디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호텔 앞쪽은 아직도 계속 공사하고 있더라. 1년 반 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길을 이번엔 혼자 거닐었다.



어젯밤 말라게타 해변을 갈 때도 보았지만, 또다시 마주한 꽃 가판대. 결국 우리가 맺어지고 난 후 그녀와 다시 한번 말라가를 방문했을 때 서프라이즈로 이곳에서 꽃을 사줬었다. 이제는 줄 사람도 더 이상 없는데 마치 그때처럼 꽃 한 다발을 구매했다.




언젠가 그 아이와 갔던 식당을 다녀왔다. 감바스와 샹그리아를 주문했던 곳. 분명 그대로 시킨 것 같은데, 막상 받아보니 다른 것이 왔다. 그때는 분명 빨간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얀색 감바스네?



물론 맛있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말라가에서는 내가 무언가를 나서서 한 게 많이 없던 것 같다. 주문도 그 아이가 해줬고, 길 안내도 모두 해줬었네.. 그 아이가 없는 말라가는 예전에 먹었던 같은 음식을 시키기조차 힘든 곳이었구나.


말라게타 해변을 한번 더 산책 삼아 다녀오고, 그 아이가 다녔던 어학원 앞도 지났다. 당시에는 앞쪽 길이 한창 공사 중이었는데 그것도 끝났고, 이제는 그 어학원조차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적혀있었다. 아니, 심지어 이사한 것도 이미 오래전이고 현재 지도에는 폐업이라고 뜨더라. 1년 반이 지나도 마찬가지인 게 있지만, 크게 바뀌는 것도 있구나 싶었다.




잠시 숙소에서 숨을 돌린 뒤, 드디어 그녀와 나의 장소에 다녀오기로 했다. 말라가에서 비교적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로지 '우리'에게만 특별했던 곳. 관광지로 유명한 말라게타 해변이 아닌, 고요함을 넘어 이제는 쓸쓸하기까지 한 우엘린 해변에.


우엘린에 가는 길은 여전했다. 바로 앞에 있던 공원도 여전했고, 잔잔한 파도와 사람이 많이 없는 풍경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그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전에는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까지 쭉 산책을 다녀왔다. 비록 처음 마주하는 길이었다고 한 들 전혀 새로운 장소는 아니었다. 그녀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매일 보았던 장소. 그 아이는 늘 이 길을 걸으며 산책을 다녔고 운동을 했다.

   

해가 진 후, 저녁식사를 하러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식당을 다녀왔다. 비록 이번에는 혼자라서 빠에야를 시키진 못했지만 그때와 똑같이 주문한 뽈뽀 프리또(문어튀김). 역시나 너무 맛있는 곳이었다. 여행하면서도 이곳의 음식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여행 간 오징어 튀김은 종종 먹었지만, 문어 튀김은 이곳에서 먹고 싶었기에 참고 참았다.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오늘은 비교적 괜찮았다. 우엘린에 노을을 보러 갔을 때도 그리 눈물이 나지 않았고, 말라가에 있다는 사실도 크게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밤의 우엘린에 다시 가기 전까지는.  




 다시 찾은 우엘린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고, 그곳엔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저 파도가 철썩이는 걸 한참이나 가만히 쳐다보다가 꺼내 들었던 나의 핸드폰.


헤어진 지 이미 세 달이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아직 차마 삭제하지지 못했던 우리의 사진과 연락들을 이별한 후에 처음으로 죽 훑어봤다.


그 내용에는 사랑도 많이 남겨있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들도 고스란히 남겨있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구나. 이런 상처를 줬었구나. 왜 지금은 아는 걸 그때는 몰랐을까.


내가 주었던 상처로 인해 그 아이가 당시의 느꼈을 아픔, 이제 그 아픔을 느낄 그녀는 더 이상 없기에 내가 준 상처와 감정은 그대로 내게 돌아와서 스스로를 너무 아프게 만들었다.


결국 마음이 너무 아파 펑펑 울었다. 어제는 그녀와의 추억을 보내기 위한 후련함의 마지막 눈물이었다면, 오늘은 후회와 아픔으로 쉼 없이 슬퍼했다. 한 30분은 서럽게 혼자 울며, 그저 이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봐.. 내가 이겨낼 문제가 아니랬잖아. 이건 내가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아니었잖아. 내가 이 관계를 망친 건데, 아무 일 없단 듯이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엔 내가 너무 잘못했던 것 들이잖아...'




그렇게 펑펑 울다가 숙소로 들어왔다. 우엘린에서 돌아오는 길 역시 참 한결같았다. 늘 다녔던 길인 만큼, 너무 울어 지친 상태였음에도 자연스레 몸이 기억하는 대로 걸어 아무 문제 없이 숙소에 복귀했다.



네가 없는 말라가는 처음이야.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표현해야 할 것 같아. 네가 없는 말라가가 처음인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했던 말라가가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거구나. 그 사실이 참 너무 아팠다. 앞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는 함께 할 수 없겠지. 온갖 네 생각밖에 나지 않는 이곳, 이곳은 네 말라가였구나.


씻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남은 일을 하다 보니 밤 12시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아침 8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런 계획도 없던 지금의 여행에서 유일하게 세워두었던 계획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말라가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 마지막 날은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자. 충동적인 일은 아니었던 만큼 담담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에게 답장이 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아이는 내 연락을 거절하겠지.


다만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나는 오늘 밤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내일이 끝이구나.

이전 06화 마지막 도시는 스페인의 말라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