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아 Mar 12. 2024

마지막 도시는 스페인의 말라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오전 6시 반,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나와 보배공항으로 가기 위해 Porte Maillot 역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보배 공항은 샤를드골, 오를리등 메이저한 공항과 달리 시내로부터 한 시간 이상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에 접근성이 참 별로인 곳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보러 처음 프랑스로 놀러 오는 날, 기대와 설렘을 안고 마중 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려 공항까지 가는 길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홀로 이동해 보니 참 먼 곳이었구나.


이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한데


오랜만에 도착한 장소의 익숙한 장면. 조금은 휑한 듯 느껴지는 풍경과 여전히 북적거리는 공항버스 정류장, 출발과 도착이 정신없이 적혀있는 전광판까지 그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머물던 열흘간의 파리 일정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녀와의 추억을 홀로 마주하러 가는 만큼 가는 길 내내 왠지 모를 긴장감이 맴돌았다.   




내가 타려던 비행기가 무려 8시간이나 지연됐다.


원래는 오전 10시쯤 출발했어야 할 비행기지만, 출국 심사를 다 마친 후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샌가 전광판에서 그 도시로 가는 항공편 정보가 사라진 후 머지않아 대폭 지연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유럽에 살았고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1~2시간 지연되는 경우야 꽤나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8시간이나 미뤄지는 건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인 만큼 꽤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 도시에 가지 말라는 계시인가?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붙잡은 건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스쳤고, 실제로 그냥 파리로 돌아가서 혼자만의 시간이나 보내다 귀국할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꽤나 긴 시간 지연이 된 만큼 공항 관계자들은 출국장에서 다시 공항 로비로 이동하여 대기해 달라는 안내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과거엔 몰랐던 사실을 하나 마주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일단 출국장에서 입국장으로 이동한 뒤 다시 공항 로비로 나갔는데, 그 장소는 내게 정말 익숙한 곳이었다. 그녀가 처음 프랑스에 오는 날 그 입국장 앞에 있는 출구에서 한참을 기다렸었으니깐.


그런데 입국장과 공항 로비를 이동하는 그 출구가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는 구조였더라. 곧 문을 열고 나올 그녀를 기다리며 바깥에서 안을 볼 때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유리였던 터라 언제 그녀가 나올지 짐작도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나오기 전부터 내가 바깥에 서있는 내 모습을 보았겠구나 싶었다.


안쪽에선 바깥이 보였구나. 내가 문 앞에 있던 걸 알고 있었겠네


아직 그때는 관계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 있던 당시의 설렘이 가득했던 해프닝에 대한 진실을, 이미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후에야 그날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려 드디어 체크인을 마치고 무사히 비행기를 탑승했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이동하는 탑승객 모두가 이륙할 때 환호하며 박수를 칠 만큼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다.


파리에서 그곳까진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감정이 요동치느라 그리 편안한 비행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슬픔에 빠지지 않게 계속 마음을 환기시켰다. 그러기 위한 이번의 여행들이 있었잖아? 나의 행복했던 이번 여행 경험이, 이곳에서의 추억도 마무리시켜 줄 거야.


나는 괜찮을 거라고 수없이 다짐하다 보니 어느샌가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 점점 익숙한 풍경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고, 더욱더 긴장감이 들 무렵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을 마쳤다.


그렇게 나는 그녀가 살았던 도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도시이자 행복한 추억밖에 없는 스페인의 말라가에 도착했다.          




말라가, 적다면 적게 와봤다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도시. 마치 어제도 왔던 것처럼 익숙한 입국장을 지나 이전과 같이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했다.  


내가 잡은 숙소를 구글 지도에 쳐보았는데, 바로 옆에 그녀가 살던 집 주소가 마킹이 되어있더라. 한국에선 구글지도를 잘 사용하지 않는 만큼 그 장소를 마킹을 해두었단 사실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내가 묵게 될 숙소에서 1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로, 물론 나도 아주 잘 아는 길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있기로 한 시간은 딱 2박 3일. 오늘은 항공기 지연으로 인해 대부분 날렸으므로 사실상 이틀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이곳의 많은 것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눈에 담고 싶었기에 늦은 시간임에도 숙소 체크인을 빠르게 마친 뒤 바로 밤산책을 나갔다.


말라가의 장소들은 대부분 외우고 있는 만큼 오랜만에 보는 그 익숙한 풍경은 참 아프면서도 기억이 맴돌더라. 시간이 늦은 터라 말라게타 해변 정도만 다녀오려 했는데 그 길을 걸어가며 마주한 모든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만나서 걸었던 길, 꽃을 사주었던 가판대, 처음 반했던 와인바 등 모든 게 그대로였다.


비가 조금 왔지만 춥지는 않았던 와인바


사실 외출을 한 직후부터 이미 턱 끝까지 눈물이 찰랑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꾹 참고 또 참았다. 말라게타에 가서 이 감정들을 모두 풀어기까지 조금만 더 참자고 다짐하며 눈물 꾹 참고 걸어갔다.



      

도착한 말라게타 해변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별이 잘 보이고, 바람은 적당히 선선하고,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직 사귀기 전, 말라게타의 밤바다에 앉아 혼자서 별을 바라보며 이 시간을 함께하자고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다른 약속으로 인해 나오지 못했었다. 하지만 사귀고 난 이후에 그녀가 말해주더라. 그 약속만 아니었으면 내가 있던 말라게타에 바로 갔을 거라고.


당시 그녀는 오지 못했지만, 대신에 나는 찍었던 별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 생각을 하며 자리를 잡고 앉은 고요하면서도 나밖에 없는 해변가. 결국 이곳에 앉자마자 기억과 감정이 모두 터져 펑펑 울었다. 아무 눈치 볼 사람도 없고, 파도 소리에 모든 게 묻혀버리는 이곳에서 정말 펑펑 울었다. 차라리 눈물로 이 마지막 남은 감정들을 모두 흘려보내기 위해.


말라게타 해변은 혼자 온적이 더 많네


그렇게 펑펑 울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참 후련했다. 이제 정말 내 여행의 끝이 다가왔구나를 느꼈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남아있는 마지막 감정들조차 방금의 눈물로 다 풀어낸 것 마냥 아주 편안한 기분도 들었다. 물론 아직도 끝난 인연은 끝이라는 게 아프긴 하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 생각을 하며 눈물짓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사랑이고 인연이었어.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무색하게도,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 펑펑 흘릴 거라는 걸 이때는 아직 몰랐다. 남은 이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말라가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이전 05화 파리, 이곳은 나의 파리였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