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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아 Apr 04. 2024

인스턴트 여자친구 (2)

그녀에게 수많은 내 모습이 보여

이 이야기는 분명 나의 지나간 연애에 대한 얘기지만, 연애에만 초점을 맞춘 얘기는 아니다.


나와 닮은 듯 달랐던 그녀와 만났던 잠깐의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내 과거의 모습을 마주하며, 지난날의 과오를 다시 한번 스스로 적어내고 삼킬 뿐이다.




연애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나를 한번 속인 적이 있다.


사실 속였다기보단 차마 나한테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연애 초반에 얘기하기엔 꽤나 예민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내게 말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이다. 물론 막상 들어보니 내게 있어서는 크게 문제 되는 일도 아니긴 했지만.


다만 그녀가 내게 숨겼던 문제보다도, 그로 인해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오해가 쌓인 채 보내는 하룻밤이 더 힘들었다. 갑자기 연락이 닿질 않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혹시 내가 무언가 실수한 건가 하는 자책으로 얼룩졌던 밤. 이대로 그녀가 말없이 사라져 버려도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우리는 분명 사귀고 있지만 참 가깝고도 먼 관계라는 걸 깨닫게 된 하루였다.


이 오해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내게 있어선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라고 생각하는 만큼 모든 앞뒤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엔 그녀의 선택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어찌 됐던 여자친구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에 실망하거나 신뢰감이 깨지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더라.


물론 나는 그녀에게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더 제대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직 신뢰감을 운운할 정도조차도 쌓인 게 없었다.


사귄다는 관계와 신뢰감은 별개지. 그녀와 나의 거리감이 새삼 느껴졌다. 우리의 신뢰감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가 된 게 아니라, 그저 제로에서 그대로 제로였을 뿐이다.




나는 연애에 있어서 질투, 의심이라는 감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상대방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나는 늘 내 연인에게 있어서 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믿으려 한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상처도 받아봤다. 과거 만났던 연인중 하나가 나를 두고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어찌나 큰 배신감과 자기혐오를 겪었는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후에 만나는 새로운 연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내 믿음을 저버린 과거의 상처는 결국 내가 아닌 그녀가 문제였을 뿐이다.


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믿었을 뿐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고, 이후 만나는 연인들에게도 이 믿음은 늘 한결같았다. 그렇게 상대방을 늘 믿고 또 믿었다.


다만 우리의 쌓이지 않은 신뢰감과 먼 거리는 나의 연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불편한 감정을 가져왔다. 우리가 롱디인 이상 서로에 대한 믿음이 참 중요한데, 초반부터 그것이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누군가와 하는 연애에서 처음으로 의심이라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의심은 머지않아 스스로를 향한 아픔과 자괴감을 가져왔다.




그녀는 약속에 나가면 연락이 안 될 때가 있었으나, 가족모임이라거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 등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모임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종종 사진을 보내주어 근황을 공유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속 작게 피어나버린 의심으로 인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녀를 온전히 믿고 있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사건은 그녀가 악의적으로 날 속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처음으로 연인의 연락을 기다리는데 부정적인 조바심이 들었다.


이전과 달리 현재 좋아하는 사람을 전적으로 믿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 그것이 내 자괴감의 근본이었다.


앗.. 이전의 연인들도 나를 보며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나는 이성친구도 많았으며, 친구들과 참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또 술자리도 잦고, 그 시간 동안에는 연락도 거의 보지 않았다. 정말 자주 그랬다.


그들은 막연한 질투와 의심이 가진 이들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내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기에 그들은 내게 더욱 믿음을 요구했던 것이겠구나.


그들도 연인을 의심하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에 참 속상했을까?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프랑스에 살았던 나는, 애정표현의 방식이 꽤나 달랐다. 그게 단순한 친구였더라도 말이다.


하루는 당시 사귀던 연인이 옆에 있을 때 친한 이성 친구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이 왔고, 나는 반가움에 하트 이모티콘을 섞어 보냈었다.


그 연인은 그걸 보더니 내게 화를 내더라. 연락 온 친구는 프랑스인이었고, 특히 외국 친구들과는 애정표현의 방식이 더 거리낌 없었기에 나는 그것이 문제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찾아온 지금의 인스턴트 그녀, 그녀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돌려주더라.


사랑한다는 말을 포함해 애정표현을 크게 해주지는 않던 그 아이. 어느 날 본인이 친하게 지내는 직장의 남자동생을 사랑하는 ㅇㅇ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았다. 평소에도 귀여워하는 아이인 것을 알고, 나도 딱히 저런 표현에 큰 의미부여를 두진 않는다.


다만 의미부여와는 별개로 서운함이 맴돌았다. 나에게는 참 애정표현이 적은 아이인데,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저리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아이였구나.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 조금 서운했을 뿐이다.


앗..


내 과거의 모습이 보였다. 나라고 잘했던가? 친구들에겐 그리도 애정표현을 쉽게 했지만, 연인에게는 그녀가 나의 사랑임을 느끼지 못하게 행동했던 적이 참 많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당시의 내 인연들도 느꼈겠구나.




약간의 사족을 달아보자면,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자유로운 모습이 좋았다. 분명 과거의 내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모습에 자기반성과 혐오를 가질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비슷한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것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짧게나마 즐거웠다.


승부욕이 정말 센 그녀. 내가 아는 사람 중 루미큐브를 가장 잘했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계속 통화를 하며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했으며, 키우는 고양이 역시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비록 나와 같은 듯 다른 그녀로 인해 생기는 서운함도 종종 있지만, 이건 아직 우리의 관계가 얕은 탓이다.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시간이 쌓이고 서로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부분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그렇게 별 다툼 없이 흘러가던 어느 날,


나는 헤어짐을 각오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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