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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Sep 09. 2017

소선 대악 대선 비정(13)

저에게 있어서 콩국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할머니가 당연한 듯 보내는 콩으로 여름이면 콩국수를 만들어 먹었지요. 단 한 번도 사 먹어보지 않았습니다. 그 콩이 밭에서 절로 자라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저는 콩국수를 싫어했습니다. 콩으로 콩국수의 콩국물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또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모릅니다. 가족을 위한 마음이라 이해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번거로움을 이겨내는 그 근원적 힘과 그에 따른 과거가 추억거리가 되어버린 지금에야 저는 그것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가정집의 믹서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나요. 바꾸자고 권유해도 끝끝내 바꾸지 않았던 고물 믹서기에서 저릿한 탄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나서야 콩국물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국물이 아니라 마치 고운 죽 같은 콩국물이 삶겨진 면에 부어지고 난 후. 끝끝내 오이를 채 썰어 올리고는 깨를 뿌리고 나서야 콩국수는 밥상에 올려졌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기대와는 달리, 저는 콩국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미처 분쇄되지 못한 콩의 파편이 저를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국물의 점성으로 면의 사이사이에 매달려 있었고, 진한 김치를 방패 삼아 욱여넣었던 면을 씹고 나면 이제는 괴로운 콩국물의 시간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콩국수의 바닥에는 항상 덜 갈려진 거친입자가 있었습니다. 차마 곱게 갈아지지 못한 콩들이 목구멍을 스치고 지나가며 생기는 따가움과 가려움이 저는 너무도 불편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차마 삼켜내기가 너무 괴로웠던 것이지요. 이것이 내가 알던 콩국수였습니다.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어느 날 여름이 되었습니다. 콩국수를 유달리 좋아했던 당신은 콩국물을 만들어낼 정신적 육체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저는 민폐와 민폐를 거듭해 유명한 식당의 콩국물을 공수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콩국물을 공수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끼니때를 넘긴 초조함에 다급해질 대로 다급해졌을 무렵. 갑작스러운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습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하철역이나 건물 아래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어나야 하는 일은 무엇이며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당신의 병마에 그저 당황하기만 할 뿐인 상황과 닮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그 비를 뚫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그 비를 꾸역꾸역 우산도 없이 뚫고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상태로 버스에 올랐고, 콩국물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콩국수 집이기도 했겠지만 콩국수의 맛은 당신이 해준 것과 제법 비슷했습니다. 생각보다 콩국수를 잘 비워가는 당신의 모습에 보람도 느꼈습니다. 콩건더기가 없는 콩국수를 보면서 이런 콩국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도 콩국수를 비워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만나게 될 콩국수는 이것 이상일 수는 없겠다는 잡념이 생겨나면서부터는, 그 순간부터는 콩국수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콩국수, 그리고 이제 내가 만나게 될 콩국수의 차이는 단순하면서도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과의 마지막 콩국수였습니다. 




시간은 또 지나고 지나서 어느덧 티비에서는 가을을 이야기하며 떠들고 있습니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더운물을 섞어 샤워를 하면서 가을을 느낍니다. 찬물은 이제 추운 것을 보니 여름은 또 어느새 작별을 준비하나 봅니다. 이 계절의 변곡점에서, 콩국수가 떠올랐습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서 생활의 변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이러한 당연한 변화들 속에서, 그리고 이 당연한 변화에서 당신만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슬픕니다.


올여름은 콩국수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싶었고, 그렇게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생애 처음으로 콩국물의 굵은 파편을 느끼지 않는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차마 갈려지지 않았던 콩의 파편이 나를 건드리며 지나갔던 것처럼, 기억의 굵은 파편이 시간에 갈려나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한참 콩을 불리고 갈아서 콩국물을 빚어내는 고단함의 끝에는 맛있게 먹는 이들의 행복한 표정으로 보상받아야 하는 것도 있는데, 쌓여만 가는 후회에 휩싸인 저는 그 표정을 누구에게나 주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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