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어디선가, 다른 한 척의 세월호가 건조되고 있단다.
2016년 11월 24일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멍해졌다. 지식이 부족한 데다 고르지 못한 내가 보아도 우리의 부끄러운 맨 얼굴이 서슴없이 드러난 영상이었다. 영상 속엔 관념의 부재와 어쩔 수 없음. 그리고 결코 변할리 없는 고집이 있었다. 자세한 영상은 아래에 있다.
14분의 러닝타임이 그저 지루하다면 너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부끄러운 치부가 다채롭게 담겨진 하나의 미장센도 드물 것이다. 너무도 가식 없는 자연스러움이 경악스럽다.
굽고 급한 경사로에 붙어있는 여러 주택들. 공사하기 까다로운 환경이다. 더 나은 안전을 위해서 더 많이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현장의 룰은 안전이 아닌 다른 곳을 지향한다. 시대가 많이 바뀜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 많음에도, 좀 체 바뀌지 않은 현장 곳곳에 안전은 스며들지 못했다.
현장은 편의를 야비하게 사용했다. 고로 과적은 일상적이다. 허용 중량을 초과한 화물이 실린 트럭은 언덕에서 겅중겅중 묘기를 부린다. 과적이 가능한 트럭은 사용의 편의를 위함이지, 말 그대로 과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트럭이 살벌한 가래를 끓는 그곳을 서슴없이 지나가려는 보행자도 있다. 과적 트럭과 보행자를 손짓으로 안내하는 사람이 있는 자체로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안전을 이유로 과적 트럭을 되돌려 보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가. 자신의 트럭을 돌려보내지 않는 자들 앞에서 되돌아갈 수 없는 트럭의 운전수는 또 어떤가. 그리고 트럭이 아무 일 없이 올라올 것이라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 존엄 먹고사니즘은 갑갑하고 불편한 안전보다는 도박의 짜릿한 획득과 닮은 안전불감증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일까.
난 그저 이 영상이 촬영자 본인의 집을 레미콘이 흠집 낼까, 만일 흠집이 났다면 보상을 가릴 채증이 아니길 원할 뿐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레미콘 기사의 운전실력을 알리는 영상도 아니었으면 싶다. 그리고 이 영상을 본 우리가 그 혹은 그들을 대단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했으면 싶다. 다른 어느 나라라면 담배를 꼬나물고서 꿉꿉하고 늘어진 일상복을 입은 그을린 반나체의 육체노동자들이 위아래 위위아래 휘청거리는 트럭의 대가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보는 우리는 ○○의 기상이나 위엄이라며 낄낄거릴 테지만.
그 이름을 함부로 꺼내는 것마저 실례가 될까 두려운 세월호는 어디선가 이렇게 자꾸 건조되고 있다. 세월호 사고가 비극적인 이유는 불가항력적 천재지변이나 재해라서가 아니다. 인재人災이기 때문에 더없이 비극적이다.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아는 일반의 보통이나, 인재를 부른 이들에겐 '그들의 보통'이 있었다. 그들의 보통은 때로 '일반의 보통'에 들어온다. 그런 병든 일반의 보통이 켜켜이 쌓이다, 더 이상 쌓일 곳이 없으면 그제야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토록 경악스러운 영상에 차마 담기지 못한 대한민국의 다른 곳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나 혹은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슬픈 일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 '어떤 일'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예상을 할 수도, 쉽게 떠올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 혹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내 보내며 당연하게 여겼던 병든 보통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