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가 나에게 준 것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 학벌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10대 때의 반항심 가득하던 시절에는,
학벌 없이도 나 스스로의 실력이 있다면 되는 것 아닌가? 하던 때도 있었고
20대 초반에 연세대학교 입학 후에는, 알 수 없는 자신/자만감에 빠져
학벌이 인생에 전부인 것 마냥 굴던 때도 있었다.
30대 중, 후반이 접어드는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학벌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지금 1-20대를 보내는 친구들에게 있어,
인생에서 학벌이 과연 중요한가? 하는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인 것 같다.
정말로, 인생에서 학벌은 중요한가?
: 나는 재수를 했다.
고 3 때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아무래도 인서울 대학교를 진학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 3 수능이 끝나고, 담임과 대학 진학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진학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가 제시했던 대학들 역시 나도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면담은 5분 정도만에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에게도, 나에게도, 서로가 큰 의미 없는 담임과 학생 관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재수 후,
생각지도 못한 좋은 점수를 받고, 고려대와 연세대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고3 담임이었다.
그의 첫마디는 놀라웠다.
"너는 수능 성적이 잘 나왔으면 담임한테 연락을 해야지 인마. 잘 지냈어?
선생님이 잘 상담해 줄 테니까 시간 날 때 한번 학교로 와"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밀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여하튼 나는 수능 성적 하나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의도치 않게 친밀도를 높일 수 있었다.
: 세상을 살다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사실 누구도 나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나라는 온전한 한 사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
내 생각에 최소한 A4 용지 100장 분량은 필요한 것 같은데,
사회는 나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나라는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 속에서, 학벌은 그냥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첫인상으로 가장 빠르게 나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다.
대학원 입학 때도, 교수님께서 나에게 부족한 학점을 채워오라 하셨을 때도,
삼성전자에서 퀄컴으로 이직할 때, 나를 모르던 분께서 내 추천을 해주실 때도,
"그래도 당신이 연세대학교 출신이니까 일단 똑똑할 거라고 생각해요"
감사하게도 그렇게 말해주셨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나로서는 나를 그렇게 봐주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나에게 학벌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로 작용했었다.
: 학벌이라는 것은 쉽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이상 사회 시스템 적으로 축적되어 온 것이고, 그것을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다. 어차피 내가 이 사회 안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대학이라는 발판이 필요하다면, 학벌은 좋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Why not?
예를 들면, 이런 거랄까.
삼겹살 집에 삼겹살을 먹으러 왔는데, 이왕이면 냉면 서비스를 받으면 좋은 것처럼.
있으면 나쁘진 않다. 때로는 있으면 여러 단순하지만 여러 혜택을 더 보기도 한다.
: 고등학교 시절, 재수 시절 내 인생의 오직 단 하나의 목표는 대학 입학이었다.
사실 그 이외의 길은 알지도 못했고, 다른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학벌이 꼭 내 인생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살이 지나, 30살 중반을 거쳐 40대로 가는 지금에는
결국 학벌은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대학원 시절, 나와 함께 과제를 같이 하던, 나보다 더 똑똑하다고 느꼈던 지방대학의 한 박사 과정 학생,
삼성전자 시절, 나보다 일 더 잘하던 인서울 4년제 대학의 학부 출신 친구,
퀄컴 이직 시에,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여 가던 지방대 학부 출신의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보다 분명 "사회가 말하는 학벌" 수준은 더 뛰어났으나,
그들의 실제적 성취를 다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단순한 수단으로써의 학벌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사회생활에서 내가 해내야 할 성취의 방법들을 그들로부터 많은 부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
어차피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어떤 학벌이든, 어떤 학위이든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든 빛을 발하고 있더라.
: 앞서 말한 혜택이라는 건, 정말 단순하게 빠른 시간 동안 나를 누군가에게 좋은 이미지로 알릴 수 있다는 장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섭게도, 결국 중요한 건 나 스스로의 모습이다.
"연세대 나오셨다고요? 공부 잘하셨구나, 머리 똑똑하시겠다!"라고 얘기했던 누군가는,
"와.. 연대 나왔는데 이런 것도 몰라요? 연대는 아무나 가나 보네"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명문대학교 출신이라더니 역시 공부 잘해!"라는 말은,
"공부만 했더니 융통성이 없나? 왜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라는 말로 돌아오기도 한다.
단순한 하나의 시험 성적으로 이뤄낸 나의 단편적인 모습은,
마치 양날의 검처럼,
나의 무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나를 찌르기도 한다.
우리의 인생은 20대에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좋은 학벌로 누군가에게 좋은 선입견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고 지켜나가야 할 능력과 실력을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한다.
왕관의 무게는 버틸 수 있는 자에게 합당한 법이다.
: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그냥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이면 충분한 자기 집과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최소한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세대도 그러한가?
아직도 대부분은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다.
100만 유튜버가 되기 위해 좋은 학벌이 왜 필요한지, 이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는 좋은 학벌이 주는 혜택에 대한 장점과, 단점, 그리고 그 구조적인 한계에 대해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세대에서는 그것이 그리 큰 메리트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좋은 학벌에 대기업 출신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장단점을 분석해서 이를 브랜딩 하여 파는 사람들이 수백 수천 배의 돈을 더 벌어들이는 세상이다.
물론, 그것은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보다 수백 수천 배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한 좋은 학벌이라는 것의 단면에 대해 한번 정리해 보았다.
나는 솔직히 20대 동안, 나 자신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제 40대가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나를 돌아보기 위해 이렇게 브런치라는 것도 시작했지만,
정말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냥, 우연히, 대한민국에서 좋다는 학벌을 가지게 되어서,
그 시스템 안에서 여러 경험을 하고 여러 실패와 성취를 하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된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인생에서 꼭 좋은 학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학벌보다 인생에서 가져야 할 더 중요한 가치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굳이 좋은 학벌을 안 가져야 할 이유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