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둘 곳을 잃었다.
상대가 없어졌음을 인정하는 애도 과정을 마쳐야
공허함과, 그 때문에 생기는 헛된 바람에서 벗어날걸 알았다.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없어 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판단을 마쳤고 마음은 반응했다.
이성으로는 '아니, 변한 건 없어. 나는 그대로야'라고 되뇌었지만
마음으로는 모든 것이 변했음을 알았다.
받아들임의 최상의 진수는 우리가 나쁘다고 개념 붙인 일을 겪는 상황에서도 온몸이 전율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삶이 주는 모든 경험 자체를 사랑한다는 고백.
이원성의 분열 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육화 되지 않았을 본성에 대한 사랑이다.
소크라테스의 스승인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의 아름다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미에 대한 숭상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생과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맥락.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형상 없는 맥락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 캐럴린 엘리엇의 저서 '실존적 변태수업'에서 참조)
디오티마의 에로스가 상징하듯이 근원을 사랑할 때는 에고가 원하는 좋은 내용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이러저러한 것을 모두 일어나길 원했던 자신의 근원을 사랑한다는 더 넓은 의미의 '미'의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감정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해당 감정을 충분히 흠뻑 느낀 뒤, 인정해 주면 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변화한다. 슬픔을 충분히 느낀 뒤, 상황의 이면을 보고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기쁨의 환희로 덮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삶을 살 수 있다.
강한 분열 감은 강한 합일 감의 느낌(신성)을 느끼기 위한 것으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나쁜 일을 나쁜 일로만 보지 않고, 더 넓은 '미'의 관점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삶에서는 더 긍정적인 일들이 끌려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