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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에스더 Jun 10. 2022

엄마 안아주세요

아이보다 나에게 먼저 해줘야 하는 거였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말썽을 부릴 때나 심술을 부릴 때도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림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첫째 아이가 돌 때부터 읽어주기 시작한 추억의 책. 8년이 지난 지금도 두 아이에게 한 번씩 들려준다. 읽어주면서 ‘맞아, 엄마는 네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이 벌어지면 다르다. 내 눈앞에서 말썽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는 아이? 솔직히 하나도 안 예.쁘.다. 오히려 내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싫다. 






이거 먹을 거야!!




 우리 집에는 저녁 8시까지만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규칙이 있다. 둘째 아이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무조건 먹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8시까지만 먹는 거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시계를 보여줘도 쳐다보지 않는다. 아이는 떼쓰기 시작하면 멈춤이란 없는 법. 계속 먹겠다고 소리 지른다. 정말이지 귀가 아프다. 




 “지금은 먹을 시간이 지났어.” 



 인내심을 끌어모아서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처음보다 더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는 드러누워 발을 구르며 운다. 아파트인 데다 밤이면 더 시끄럽게 들린다. 점점 갈수록 멈추기는커녕 우는 소리는 더 커진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보기 싫다. 말썽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며, 울고 떼쓰는 아이? 하나도 안 예쁘다. 사랑? 없다. 드러누워 소리 지르며 우는 모습을 그만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계속 같이 있다가는 내가 폭발하겠다. 애를 번쩍 안아서 방에 데려다 놓는다. 아이는 방에 혼자 있지 않겠다고 나오려고 한다. 그런 아이를 두고 문을 닫는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게 나으니까. 


 내 귀에는 애가 더 격하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불편하다. 이러다 아이가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어떡하지? 









왜 이렇게 울고 징징거리던지. 늘 불만이 얼굴에 있었다니까.




 친정엄마가 내가 어릴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말해줄 때가 있다. 그런 때에 엄마는 나를 달래주기보다는 혼냈다. 울음이 하도 안 멈출 때는 몽둥이를 가져다가 내 옆에 놓을 정도였다. 


 엄마가 되어보니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아이가 울고 떼쓸 때 듣기 힘들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리고 싶다.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게 잘 안 된다. 거기에 울면서 안아달라는 아이를 안아주는 건 더 안 된다. 


 이때 내 마음이 너무나 차갑고 냉정하다. 아이를 향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의 어떤 모습이든 사랑한다는 것. 너무 어렵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럴수록 자꾸 죄책감이 올라온다. 엄마인데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아이가 떼쓴 것보다 그 모습을 받아주지 못하고, 우는 아이를 안아주지 않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해심 많은 품이 따뜻하고 넉넉한 엄마이고 싶다. 하지만 잘 안 된다. 밤에 누워 내 행동을 곱씹으며 후회한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더 커진다.     






  돌아보면 어릴 때 내가 울면 따스하게 위로받은 경험이 없다. 오히려 착한 아이, 사랑받는 아이가 되려면 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게 좋은 거라고 바뀌었다. 


 어느 순간 내 욕구를 누르게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게 강하게 자리 잡았다. 내 상태보다는 엄마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중요했다. 그게 어른이 되어서는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이 되었다. 늘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참으라고 요구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면 그걸 들어주며 위로했다. 피곤해도 참고 남을 위해주었다. 나도 힘들고 괜찮지 않은데, 나를 알아주기보다는 남들의 힘든 상황에 더 마음 썼다. 그래야 내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이는 내가 감추고 싶었던 것을 자꾸 들추어낸다. 내 민낯을 보게 만든다.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말이다. 내 부족한 모습을 밖에 꺼내게 만든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까지 사랑해요."



 아이가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건 내가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이가 울면서 안아달라는 말은 사실 내가 하고 싶었는데 참았던 거였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을 연습하면서 부족한 내 모습도 안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색하지만 내가 나부터 안아주는 것. 마음에서 온전하게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긴 변화는 아이를 안아주는 것도 더 편안해졌다는 점이다. 울고 떼쓰는 아이가 정말 바라는 건 자신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중요했다. 


 그 시작은 안아주는 거였다. 그건 내가 그동안 받고 싶었던 마음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지켜야 할 규칙을 설명하기 전에 안아주기부터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전보다 격하게 떼쓰는 게 줄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 마음에 사랑을 회복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는 그다음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시의 한 구절이다.  내 불편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아이가 보여주는 감정에도 편안해질 수 있다. 내가 자꾸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감정을 억누르다 보면 그게 나보다 더 힘이 약한 아이에게 터진다. 아이까지 눌러버린다. 그러면 아이에게도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알려줄 수 없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에 있는 책에 담긴 문장은 아이가 아닌 나 자신에게 먼저 들려줘야 하는 말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안아주고 사랑해주는 건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필요했다. 그럴 때 아이의 어떠한 모습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제대로 알려줄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는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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