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 쓰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나 입시, 취업, 결혼, 출산 등 인생의 무게가 달라지는 시점에서는 이 선택의 중요성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중요한 선택일수록 우리는 여러 가지 선택 안을 두고 이리저리 고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결국 많은 선택 중에서 우리는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로서 두 가지 이상의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머지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니 함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종 중요한 것일수록 잊어버리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내가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이기도 한)에 대한 미련과 안타까움으로부터 인생의 모순이 발생한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인생의 다양한 모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설 속 주인공 '안진진'의 결혼 문제에서 드러나는 모순은 피상적으로는 '어떤 남자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인생 선택의 모순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안진진'은 꿈, 로망, 사랑, 희망 등 삶에 대한 환상이란 없는, 삶에 대한 열정을 경멸하는 무미건조한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결혼 문제를 둘러싸고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를 두고 삶에 대한 강렬한 의욕을 불태우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결혼 상대의 두 남자가 정반대의 인물이며, 주인공에게 정반대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영규는 적극적이고 의사가 뚜렷해 안진진을 이끌어주지만, 때로 지나치게 계획적이어서 안진진에게 불편함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지금 가면 너무 빠르지 않나요? 극장은 저기 있는데, 시간은 삼십 분이나 남았는 걸요."
"아녜요. 정확해요. 주차하는 데 적어도 10분은 소요되고, 약간 걸어서 극장 도착하는 데 5분, 매점에서 마실 것 사고 화장실 다녀오면 또 5분, 좌석 찾아 앉는데 2분, 도합 22분, 8분 정도 숨 돌리고 나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요. 딱 좋아요."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 77p
한편 김장우는 사려 깊고 여유로운 성격이나, 지나치게 유약한 성격이 때때로 안진진으로 하여금 못 견디게 만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 102p
극명하게 서로 다른 나영규와 김장우 중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결혼은 나영규와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안진진의 선택이 모순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일까? 자신의 현실 앞에서 사랑을 버린 결혼 생활이 과연 행복할까?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대로, 과연 '사랑'이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결혼 생활의 행복과 연결되는 만능열쇠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오히려 환상이고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지 않은가?
결국 현실을 무시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김장우'와의 결혼이나, 반대로 사랑을 무시하고 현실의 안정을 선택하는 '나영규'와의 결혼이나 둘 다 행복과 불행의 가능성이 존재하며,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 불행한가는 살아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해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인 것이다.
결국 안진진의 선택이 모순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무얼 선택하든 모순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삶의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나 또한 무언가를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것' 때문이기보다는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그것들을 따지고 또 따져보는 것'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택을 안 하고 따지기만 하면 제자리걸음이었다. 결국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가야 할 것은 가야 우리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296p
우리가 모순을 이해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책 306p). 그런 점에서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향한 적극적 의지이며 담대한 도전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모순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 길을 선택해 살아본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행복과 불행인지 알 수 있고,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야 말로 우리가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생명력의 근원인 것이다.
모순은 모든 운동과 생명력의 근원이다. 사물은 그 자체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할 수 있으며 추향과 운동이 있게 된다. 제한 있는 물체는 어느 것이나 다 자체 모순이며 자체 모순으로 하여 자기가 자기를 지양한다. - 헤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