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inside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사이의 작은 공원을 가로지르는 건 꽤 여행 같은 일이다. 일몰은 놀이터를 비추고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엄마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정해진 주기가 있는 것처럼 각자의 아이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그때마다 나는, 무엇이 아이들을 자라게 할까 궁금했다. 미끄럼틀에서 슝 하고 내려오는 게 참 즐거운 일이고, 그네를 타다 넘어져 피가 나면 아프고 슬프다는 걸, 아이들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 나는 그게 특권처럼 여겨졌다. 모두가 누릴 수 없는 삶의 질이라는 생각.
우리의 집이 생긴 이후로는 식물에 물을 주는 일이 잦아졌다. 내 고집으로 키우는 식물들이 적어도 나 때문에 시들어 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내 끼니를 챙기듯 식물들의 끼니를 챙겼다. 식물들에게 끼니는 간단했다. 해와 물과 바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든 공평하고 일관된 것. 무한한 것.
나는 무엇이 아이들을 자라게 할까 궁금했다. 그때마다 그 자리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끄럼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엄마 나 좀 봐!" 하는 아이를 쳐다보는 그 눈, 그 눈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건 아닐까. 그 눈 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자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엄마는 자연을 품었겠다. 그 작은 얼굴에 해와 물과 바람. 영원하지 않은 생명과 영원한 생명력. 애초에 모양은 중요치 않았던 존재.
나는 지금 너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 눈 안에 있는 너의 모습을, 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끼니가 될 만한 것들이 있어야 할 텐데. 괜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