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roring
아이는 전력으로 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진다. 털썩 주저앉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더니,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던 할머니를 한 번 쳐다본다. 그제야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벌게진 아이의 무릎을 쓰다듬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하자 아이는 더 크게 운다. 할머니는 아이의 눈물을 닦으며 우리 아가가 얼마나 아팠을까 라고 말하자 아이는 서서히 울음을 그친다.
어릴 때 무통증을 앓는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다른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그 주인공을 엄청나게 부러워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와 아프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완전 무적이잖아'라는 식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적일 것 같았던 주인공은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죽어갔다. 무통증의 정확한 용어는 통각 상실증이라고 한다. 뇌 혹은 뇌에 연결된 수많은 회로 중 어느 곳에 문제가 생겨 통증이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상처와 고통은 존재하지만, 느끼지 못함으로, 상처와 고통에 대처할 수 없고, 자기를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마음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매번 틀리던 문제를 맞혔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 길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괜히 억울하고 슬픈 건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을까. 학문적으로 접근하자면 물론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질문의 답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할머니의 표정을 상상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아주 슬프고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겠다. 할머니는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네가 많이 아프고 슬펐겠다 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것이고, 아이는 그런 할머니를 보고 괜히 더 울컥했고 상처는 되려 더 쓰라리지 않았을까.
결국은 알아주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통증도 자신의 상처를 뇌(brain)가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알아주는 이가 있을 때 마음껏 슬퍼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다. 알아주면 알아줄수록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꺼내기 마련이고, 어떤 때는 힘든 얘기를 하면서도 신이 난 것 같은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최초에 한 덩어리 같았던 마음, 더 정확히 정서는 양육자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서 나눠진다. 마치 세포분열을 하는 것처럼. 알아주는 이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될까.
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점차 눈물이 그친다. 한참을 할머니 품에 안겨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또다시 뛰어 나간다. 나는 어떤 회복의 원리를 본 것 같다. 알아주는 이 품에서 충분히 알게 되면 그때는 다시 뛰어 나가는. 이제 아이에게 길에서 넘어지는 고통은 이전보다 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을 만나더라도 회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우리는 알아주는 이를 가족, 친구, 연인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알아주는 모든 과정을 공감이라고 부른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알아주기로 하자. 나의 것도 너의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