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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Feb 18. 2021

존재

being present

 좋은 기회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2년을 살았다. 내가 살았던 곳은 에티오피아 대륙의 북쪽, 바다만큼 넓은 호수가 자리 잡은 바흐다르라는 지역이었다. 그곳은 문명보다는 원시에 가까웠고, 그래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원시성이 주는 단순함은 오히려 나를 편하게 했다. 에티오피아는 전 지역에 걸쳐 다양한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부족수만큼 다양한 언어가 존재했다. 내가 살았던 바흐다르는 암하릭(Amharic)이라는 언어를 사용했고, 당시의 정권 혹은 문명에서는 표준어처럼 받아들여졌다.

 언어는 삶을 반영한다. 정서를 해석하고 신념을 담는다. 언어를 안다는 것을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암하릭에는 수많은 인사가 존재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수십 가지의 인사를 나눴고, 인사를 하느라 버스를 놓치고 약속에 늦기도 했다. "잘 지내?"라는 안부인사만 6-7가지는 되는 것 같았는데, 그 인사에 대한 대답도 족히 6-7가지는 되는 것 같았다. 바흐다르에서 지낸지도 1년이 넘어갈 무렵,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인사에 마음이 울컥한 적이 있었다.




살람 너우? (잘 지내? 어떻게 지내?)

알런알런 (응. 여기 있잖아.)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에 여기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

순간 나는 그들의 대화가 이렇게 들렸다.


의미 있게 살고 있어?

응.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잖아.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떠난 타지에서의 1년. 반복되는 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내 하루하루가 너무 초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계속된 거절 속에서 무기력은 학습되어 갔다. 이 시기쯤 내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은 노트북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감자를 쪄먹는 일, 자전거를 타고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일,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일 등이었다. 한국에서는 한량이라고 불릴 일들. 나는 왜 그들의 대화에 마음이 울컥했을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그저 그런 위로가 필요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느낀 감정은 위로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 깨지는 느낌.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나의 힘듦이 끝나지 않았었구나 라는 깨달음이었다. 난 존재에는 의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목표가 있어야 하고 성취를 해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반대로 말하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1년 동안 많이 초조했고 두려웠다.


 그들의 언어에서 존재는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존재 자체가 의미이고, 존재하는 한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암하릭에 이렇게 많은 인사가 있다는 건, 서로의 존재를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닐까. 무엇보다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해야 할 일들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일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어떤 일은 정상 바로 직전에 하산되고 만다. 이따금 다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고, 결국 올라가지 못할까 두려워진다. 그때마다 난 그들의 대화를 떠올린다.


 존재하고 있음을 되뇌며, 영적인 손으로 심장의 안쪽을 툭툭 두드린다. 그리고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나만큼 소중한 존재들이 지근거리에 존재하고 있다.


Harar, Ethiopia(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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