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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Choi 최다은 May 27. 2024

너는 나다. 너하고 나는 같다

*해당 브런치북은 개인적 신앙에 따라 성경적 가치관에 근거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노동력이자 노후대책이었기 때문에 자녀생산을 위해 결혼을 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보다 낭만적인 이유,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결혼을 했다. 사랑한다면 가난을 함께 겪어도 행복할 것이라는 그런 믿음으로 결혼을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혼한 부모들이 깨지고 분열된 모습을 보고 자란 지금의 세대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요즘 세대의 결혼의 목적은 편리함에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사람과 결혼하면 조금 더 편한 삶이 보장될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에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건'이 결혼에 있어서 중요해졌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결혼의 목적과는 별개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관은 무엇일까?


[창 2:23, 새 번역] 그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로 부를 것이다'라는 구절은 사실 히브리어로 보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히브리어로는 남자가 '잇쉬', 여자는 '잇샤'라는 뜻인데 ‘잇샤’는 ‘잇쉬’에서 여성형 접미사 하나만 붙인 것이라 한다.


원어의 해석은 내가 ‘잇쉬’이기 때문에 너도 ‘잇쉬’이다. 우리말로는 너는 나다. 너하고 나는 같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은 단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아니다. 물론 편리함을 위한 것도 아니다. '너는 곧 나다'라는 고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가 ‘너는 나다’라고 고백한 그 여자와 만나 결혼을 한다. 그 결혼을 성경에서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창 2:24, 새 번역]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는 원 뿌리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원가정의 상처나 결핍 등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오는 문제로 갈등하는 일이얼마나 많은가? 그것으로부터 떠난다는 의미는 성인이 될 때까지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탐구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잘 받아들일 수있는 상태가 아닐까.


상대 배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뿌리의 상처에서 아직 자라지 못한 상대의 어린아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아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동시에 필요할 것이다.


그런 상태가 돼야 온전히 나와 네가 하나로 결합하여 ’ 너는 나다‘라는 고백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둘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의 질서로 만든 결혼제도이다.



성경의 결혼관은 놀랍다. 놀랍도록 신비롭다. 둘이 하나가 되는 원리는 결혼이 아닌 어떠한 제도에서도 적용되기 어려운 신비로운 개념 아닌가?


나의 가정도 이 가치관에 근거해서 바로 세우고 싶다 간절히.. 그리고 이러한 나의 노력이 그 과정 중에 있다고 믿으며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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