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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Choi 최다은 Jun 09. 2024

상대의 밑바닥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2012년 12월 23일. 하필 손도 발도 꽁꽁 얼 것 같은 한파가 대한민국을 강타한 그날, 우리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만나기로 한다. 지금도 여전히 생생한 남편과의 첫 만남의 썰을 풀어볼까나 하하 참고로 나는 지금 결혼 10년 차 아줌마이다.



소개팅을 나가면 늘 기대와는 달리 늘어지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상대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잘 웃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하고 친절하게 대화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꽤나 공허했던 기억들이 많았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게다가 소개팅 상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나같이 상냥하게 반응하는 여자에게 100% 에프터를 신청하더라.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확신한 듯 말이다. 실제로 모 대학병원 레지던트를 하던 전문가의 길을 가는 어떤 소개팅 상대는 '감히 지가 머라고 의사를 까냐며...'주선자를 통해 황당무계한 컴플레인을 나에게 전달했던 일도 있어서 소개팅은 나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나이 서른 하나, 둘 넘어가니 이거라도 해서 기회를 만들자는 어쩔 수 없는 핑계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면 나의 반쪽은 어디 있을까? 뭐 이런 로맨틱하고 꿈같은 상상을 마음껏 펼치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왕 만나기로 했으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강남역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친다. 살짝 까무잡잡한 나의 피부를 가리며 뽀샤시 효과를 주기 위해 파우더를 톡톡 두드리는 중에 그에게 전화가 온다. 매우 상기된 목소리. 핸드폰으로 들려오는 그의 첫 음성은 가벼운 느낌? '목소리가 남자치곤 얇은 거 아닌가?' 대화를 하는 중에 살짝 실망하였지만 이내 그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얼른 장소를 다시 알아보고 전화를 주겠다는 긴박한 전달을 하고 마무리된 첫 통화.

그렇게 새로운 장소의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1층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바로 유리문을 열어주던 그 순간, 첫 느낌은 '일단 키도 크고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네, 근데 내 얼굴 알고 있네. 주선자 이 눔! 나한테는 사진 안 주고 내 사진은 보냈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많이 기다리셨어요?"^^라고 첫 만남의 운을 띄운다.


그리고 우리는 3시간 내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대식가인 그가 그날은 파스타를 반도 못 먹은 인생의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결혼을 결정짓는 것은 어쩌면 나의 가치관을 훅 치고 건드리는 사람을 만났다는 직관적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그를 처음 만나 3시간을 폭풍수다를 떤 후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직감하였으니까,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는 매우 선명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모노톤이 아니라 또렷하고 진한 자기만의 색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한 사람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라온 환경에서 주었던 익숙함으로(친정어머니의 반짝이고 또렷한 색상) 그가 끌렸는지도 모르고 사춘기를 스스로 모범생의 틀 안에 가두었던 나 자신이 숨 막히게 답답해서 그 틀을 벗어났던 그가 강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가 좋았고 그날 이후로 우리는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같이 만나는 불같은 연애의 '하트 뿅뿅' 비이성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하트 뿅뿅 비이성적인 상태는 4개월 만에 결혼을 결정하고 정확히 11개월 만인 다음 해 11월 23일 식을 올리는 것으로 해피엔딩인 줄 알았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10년 차인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종종 남편에게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냐며 '그때는 그랬지' 설레던 시절을 꺼내오려고 하면, 민망하니까 이러지 말라며 도망가는 그를 본다. "후회하냐? 흥!"


누군가 결혼을 어떤 사람이랑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10년 차 아내인 나는 여전히 이런 말도 안 되는 낭만적인 대답을 하고 싶다.


"상대가 그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더라도 거기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랑 해야 하지 않을까?



12년 전 이때가 그립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그렇지 않다. 밑바닥까지 보고 또 본 우리지만, 그때처럼 설렘도 전혀 없이 서로에게 외적으로 잘 보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찐 남매 같은 관계가 되었어도, 지금의 징글 벙글 익숙함이 더 좋다고 어찌 됐든 내 옆에 살아 숨 쉬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Dana Choi, 최다은의 브런치북을 연재합니다.


월       [나도 궁금해 진짜 진짜 이야기]

화. 토  [일상 속 사유 그 반짝임]

수       [WEAR, 새로운 나를 입다]

목       [엄마도 노력할게!]

금       [읽고 쓰는 것은 나의 기쁨]

일       [사랑하는 나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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