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막내딸이 소심한 아이를 낳다.
엄마는 5남매 중에 막내 (첫째 삼촌은 6.25 전쟁 중 세상을 떠나시고 둘째 삼촌도 엄마 결혼 후 내 동생을 임신했을 때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금은 딸 셋 중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다. 두 분이 북한에서 결혼하셨고 경계가 상대적으로 삼엄하지 않았던 삼팔선 시절, 남한으로 이동해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하고 목숨 걸고 북에서 내려오셨다. 할머니 살아 계실 때 나에게 삼팔선 넘어온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얼굴에 까맣게 색칠을 하고 태어난 지 백일 좀 지난 갓난 아가를 안고 불빛이 없을 때 죽을힘을 다해 달리셨다고 한다.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울에 터를 잡으셨다. 할아버지가 남산에서 얼음물을 판매하신 것으로 시작해서 중간 상인 일을 하셨고 엄마는 가난했지만 끼니를 오래도록 굶어본 기억은 없을 정도로 강인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 안에서 자랐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3미터가 넘는 성곽 위를 빠르게 걸어 다니며 그 높이에서 노는 스릴을 즐겼으며 흙 속에 파묻혀 자연을 벗 삼아 씩씩하고 당찬 소녀로 자랐다. 지금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를 갈망하는 우리 엄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와 정 반대의 기질을 가진 엄마가 닮고 싶은 이유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참 소심한 아이였다. 예민하기도 정말 예민했지 만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사내대장부 같은 엄마가 지극히 소심한 첫 딸을 키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엄마 말을 빌리면 “넌 지구상에서 가장 키우기 힘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별났어.” 그런 내가 지금 "나 어릴 때 소심했고 부끄럼도 많았어"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엥? 네가? 이런 반응이 바로 튀어나오곤 한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도 함께. 엄마에게 받았던 따뜻한 위로들이, 늘 나의 편이 되어 주셨던 엄마의 응원들이 지금 나를 만들었던 버팀목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그때는 국민학교 1학년으로 불리던 시절, 여전히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를 못하고 말을 섞지 못하는 아이였다. 오죽하면 선생님께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 청소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의 실수로 내 자리가 사라졌다. 내 책상이 사라졌는데도 내 자리가 없어졌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할 수 없었던 나는 혼자 속상해서 울다가 마셨던 우유를 모두 토했고 선생님께서는 집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해 주셔서 혼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하고 부끄럽고 내 자신이 바보 같아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엉엉 울며 집에 갔는데 엄마가 나를 꼭 안아줬다. 괜찮다며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엄마품에서 한동안 위로를 받으며 감정을 추수 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신나게 동생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나는 엄마에게 용납받았던 기억들이 많다. 어릴 때 매우 부정적이고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해” 끊임없이 불안해했던 내게 엄마의 지적과 비난만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자랐을까? 지금 분명한 건 어른이 된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딸아이에게도 나는 그럴 수도 있지 힘들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물론 화가 날 때도 종종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에게 타인을 용납하는 것을 가장 처음 깨닫게 해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