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üneburg, Niedersachsen
다사다난했던 2022년도 끝나 가고, 독일 여기저기에서는 한창 크리스마스 마켓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친구들은 대신 즐겨달라며 DM 하지만, 당장 과제에 치여 죽고 있는 나로서는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4시만 돼도 가로등 하나 없이 새까만 도시, 자비 없이 몰아치는 차가운 칼바람과 바닥이 아닌 벽의 히터에서 새어 나오는 건조한 온기를 느끼다 보면 “아 이제, 독일에서 맞는 겨울이 제대로 시작이구나”라고 느껴질 뿐이다.
매일 아침처럼 티 보일러로 물을 한 바가지 끓여, 내 하루의 온기를 충전할 차 한잔을 텀블러 품에 안은 후에, 문을 나섰다. 한 달에 한번 있는 6시간짜리 세미나를 들으러 가기 전에, 주말을 맞아 우리 동네에 놀러 온 남자친구를 픽업하러 기차역으로 향하는데, 눈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튀빙겐에서 교환학생을 했을 때는 따듯하고 파릇파릇한 독일만 봤는데, 드디어 하얗고 차가운 겨울의 독일을 보게 되어, 오랜만에 눈을 보며 아이처럼 신났다. 행복도 잠시, 두꺼운 후드티에, 비니에, 안경에, 목도리에, 마스크에, 가방에, 티켓에, 핸드폰에, 버스를 타기 전에 챙겨야 할 온갖 것들을 몸에 걸치다가 현타가 씨게 온 것이다. 그 와중에 다음 1시간 동안의 기차란 기차는 다 연착되거나 취소되고(개복치냐고... 누가 보면 눈폭풍 치는 줄 ㅠㅠ), 눈 온다고 데이터도 안 터지고... 시벌탱... 한국이 최고야...
많은 것을 느꼈던 2022년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는 요 며칠. 11월부터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홈리스들. 전쟁 때문에 남겨두고 온 가족을 걱정하며 우는 친구와 그 옆에서 자기 잘못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끼며 눈물만 글썽이는 친구. 내가 매일 보는 장면들이다. 유럽에서, 독일에서. 예쁜 건축물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서도, 인간들은 서럽고 어두운 겨울에 들어서고 있다. 언제나처럼.
덜렁대는 데다가, 감정 동요가 적은 단순쟁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걸 엎어버리기도 하는 완벽주의자.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지만, 감정 소모를 싫어해서 평소에는 조용히 내 할 일만 하는 나.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극단적으로 해버리지만, 하기 싫은 건 금전적, 사회적 이득이 걸려있어도 온갖 수를 써서 안 하는 나. “나는 I/ENFP야”. MBTI는 나를 설명하기 쉽고 재밌는 틀이지만, 무척 한정적인 액자이기도 하다. 1995년부터 2022년까지, 아니 내 인생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온 더 먼 과거부터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행복, 굴곡, 배움, 사람, 여행, 책, 영화, 주위 사건 등 하나하나가 모여, 16가지 중 하나의 유형으로 정의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27살쯤 되면 이런 내 안의 여러 모습과 조화롭게 살아가게 된다. 서울에 살 때 좋은 친구가 그랬다. 내 마음 안에 하나의 마을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라고. 가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그중 몇 명을 붙잡아 두고 대화하도록 하면 답이 찾아진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다, 올해 겨울을 독일에서 맞는 것이 특별하게 설레는 이유는. 이번 겨울을 지나고 나면, 어떤 면에서 또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