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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Apr 02. 2020

84 - 벚꽃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요즘 집 근처 뒷산을 매일 오르는 재미에 빠졌다. 이사 4년 만에, 코로나 덕분(?)에 발견한 보물 같은 곳. 인위적으로 정돈되지 않아 자연미를 적당히 즐길 수 있고,  난이도가 높지 않아 1시간 내 가벼운 산책이든 파워 워킹이든 모두 가능하다. 산 위까지 올라오는 갈래 길이 여럿인데, 그중 한쪽 길에 키 큰 벚꽃나무 여러 그루가 반갑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둡게 텅 빈 나무였는데, 벚꽃은 늘 그러하듯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매일의 운동에 이만한 보상이 없다. 한데 어우러져 있는 환한 벚꽃 송이송이는 마치 누군가 건넨 러브레터처럼 달콤하다.


피고 지는 이 잠깐의 꽃을 평일 낮 여유 있을 때 온전히 즐겨보자 마음먹고, 작년에는 애써 세네 군데 꽃구경을 다녔다. 이전에 회사를 다닐 때는 여의도 윤중로에서 매년 벚꽃을 거저 누리던 것도 생각난다. 점심시간에 짧게 걷기에도 엄청난 인파를 통과해야 했다. 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역이 마비되기도 하고, 야간에 조명받은 꽃나무 숲을 거닐며 말 그대로 순간의 ‘축제’를 즐겼다.



오늘 영등포구청에서 알림 문자가 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예상대로 벚꽃놀이 명소인 여의도와 안양천 봄꽃길을 전면 폐쇄한다는 내용이다.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쟁 기근 재난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당장의 식량이나 생필품 수급에 관한 절실한 공지도 아니다. 먹는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그저 예쁜 꽃. 봄꽃 한 번 보러 가지 못하게 막는다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세계 전역에서 아파하고 죽어가는 환자를 생각하면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슬프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고 교감하는, 자연과 사람이 주는 모든 선물을 거부하고 계속 뒷걸음질 쳐 달아나야 하는 현실이. 계속 멀어져야 하고, 만날 수 없다는 이 찬란한 봄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황금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것들. 너무나 일상이었기에 귀한 줄 미처 몰랐던 것들. 2020 봄, 올해 유난히 아름답고 싱그러운 벚꽃 보기를 돌 같이 하련다. 욕심 내지 않고 고요히 ‘벚꽃 엔딩’을 기다리겠다.




( + 사진은 지난 어느 해인가 만났던, 옛사랑 같은 :) 벚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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