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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Apr 03. 2020

85 - 걷는 길, 뛰는 길


초록빛 인조 잔디 운동장의 둘레를 따라 오늘도 트랙을 걷는다. 충격이 완화되는 우레탄 바닥에 적당한 폭이 안정감을 준다. 트랙 안에서 따로 구분선은 없지만 안쪽은 걷는 길이고, 바깥쪽은 뛰는 길이다. 나는 뛰지 않고 줄곧 걷는다.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돌아보니 3 천보쯤 된다.


처음 동네 뒷산에 올라왔을 때, 뻥 뚫린 이 넓은 운동장이 신기하고 좋았다. 흙과 돌이 있는 다른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트랙을 걸으며 바퀴 수를 채울 때 나름 성취감을 느낀다. 무념무상으로 걷기도,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기도 하는 비밀의 장소.


마스크 쓰고 모자 눌러쓰고, 발바닥이 땅에 닿는 순서도 생각하고, 아랫배에 힘도 주고, 박자에 맞춰 숨 쉬는 것도 열심히 한다. 듬성듬성 다른 분도 걷거나 뛰지만, 마치 이 런웨이에 나 혼자 자신감 뿜뿜하는 모델인 것처럼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다.




그럼 나는 왜 뛰지 않고 걷기만 할까. 멋스러워 보이는 기능성 스포츠웨어를 장착하고 제대로 런닝을 하는 이들이 내 앞으로 사라져 가는데도. 나는 묵묵히 같은 속도와 보폭으로 쉬지 않고 걷는다. 여섯 바퀴쯤 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스스로 잘 걸어간다.      


절대로 무릎 관절이 걱정돼서 안 뛰는 건 아니다(내 도가니가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다). 조금만 피치를 올려 냅다 뛰면 칼로리 소모는 물론이요 더 운동하는 기분도 날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 때문에 걷고 있다고, 오늘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좋아하는 작가님의 책 제목이기도), 천천히 똑같이 꾸준히 반복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넘어 해도 넘어가는 시간 이 산으로 오는 일, 집에서 저녁을 지혜롭게 차려 먹는 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력을 넘기고 아침 기도를 드리는 일, 창문 열어 환기를 시키고 양치를 하면서 같은  영어 영상을 듣는 일...


매우 작은 것들이지만 쪼개어진 그 한 가지씩을 계속해보고 있다. 어떤 성과냐 따지지 않고, 감정이나 기분으로 좌우되지 않도록, 해오던 그대로 그저 해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뛰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줄곧 걷는다. 지금 걷는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걷는 길' 위에서, 한결같은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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