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의 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서련 Oct 09. 2022

보지 않고 믿는 자

평소에도 항상 같은 고민에 매달리지만 요즘에는 더더욱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해 괴로워하는 중이다. 후회가 쌓이고 쌓여 쳐다 보기 괴로운 지난 나날들. 그것들을 돌아 보고, 앞으로 또 후회로 질퍽이는 길로 들어서는 건 아닌지 걱정의 안개를 열심히 만들어 낸다. 내 주변으로 안개가 자욱한 와중에 옆을 둘러보면 다들 반짝이는 빛을 내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러다보니 제 자리에 서 있는 나는 발 한걸음 떼지 않는데도 뒤로 성큼성큼 움직이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응석받이 막내로 자란 나는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서서 남탓하곤 한다. 기도를 하며 하나님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내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불평과 원망만 이리저리 던져버린다. 나 혼자 시부렁거리니 상대방도 없고,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수도 없다.  


그렇게 지내다가 지난 주일에 교회에 갔더니 작은 것에 감사하라는 찬양이 흘러나왔다. 별로 감사할 게 없는 상황에서도 굳이 감사해야 할 거를 찾아가면서 어떻게든 맞닦뜨린 현실에 긍정적으로 순응시키려는 수작인가? 작은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받아서 음식만 보여주면 침을 줄줄 흘려야 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살아야만 하는 게 내게 주어진 역할인걸까? 이 와중에 목사님의 설교에 나온 제자의 역할, 구원의 희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진짜로 음식을 먹어보고 맛나야지 맛있다고 신이 나서 리뷰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 맘이 기쁘지가 않은데, 어떤 수로 기뻐 마땅하다는 소식을 기쁨이 가득하여 알릴 수 있겠는가.

8년 만에 본 텅빈 자리!

그 다음날, 둘째 아이의 생일을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축하하기 위해 아침에 학교 근처 마트에 갔다. 그랬더니 한 8년간 여기 살면서 한번도 떨어진 적을 본 적 없던 (애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 안 좋아하는 미국식) 미니 머핀이 그 날따라 매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텅 비어있던 자리.


원래 계획이 어긋나서 짜증이 났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기도라고 하기도 민망한 '아, 하나님.....진짜 왜.......'정도?


그래도 미니 머핀을 사긴 해야할 듯 하여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마트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 갔더니 일반 미니 머핀도 있고, 시즌에 맞추어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머핀도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심지어 'Nut Free'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미국에서는 학교로 간식을 가져갈 때 모든 아이들의 건강이 위협받지 않도록 알러지 여부를 확인하고, 가져가는 음식에 알러지 발생 재료가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게 아주아주아주 중요한데, 이 부분에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고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았다는 생각이 딱!!! 들자 (멋쩍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감사 기도가 나왔다. 기쁨이 희미하게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가 계획한대로 되지 않을 때, 인간적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최고의 길로 가기 위한 여정일 수 있겠구나, 라는 마음의 위로가 왔다. 이게 성령님이 마음의 눈을 열어주신 거겠지? 내 성격상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되기는 너무 힘들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 참 맞다.



글을 더 다듬고 싶은데 계속 미루다가는 평생 안 올릴 거 같아서, 그러면 이 은혜로운 순간이 망각의 늪으로 평생 빠져버릴 것 같아서 부리나케 올려버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찮게 꾸준하게, 하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