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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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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Nov 22. 2019

멍석깔린 결정

누구를 탓하리오

첫째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 머릿 속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서 신랑이 돌보고 있는 둘째를 어르고 달래줄지, 아니면 근처 슈퍼에 잠깐 들려서 장을 볼지 두가지 선택 안을 두고 투닥거리고 있었다.  골목에서 큰길로 진입 하려고 기다리며 어디로 갈지 고민에 빠졌다. 집은 간단하게 우회전, 슈퍼는 골치 아픈 좌회전이다. 여유롭게 고민에 잠기고 싶었는데 염치없는 어떤 여인네가 멈춰서 있는 내 차옆으로 쓰윽 차머리를 들이밀더니 얌시럽게 우회전하며 지나가버린다. 내 뒤에는 다음 차 두어대가 꼬리를 만들며 기다리고 있는지라, 어쩔수 없이 내 차는 좌회전 차량이 되버렸다....고 생각했다.


편도 2차로, 총 4차선 도로에는 아침 출근길 차가 빽빽하게 늘어서있다. 다만, 나와 내 차가 바라보는 정면만 모세가 갈라놓은 홍해바다처럼 깨끗이 벌어져있다. 골목 진입로이기 때문에 Keep Clear (공간확보) 교통 사인이 바닥에 커다랗게 써 있다. 다들 그저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 뿐인데....누구도 창문을 열고 나에게 움직이라고 소리치지 않았는데 나는 무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젠장, 줄지어 선 자동차 때문에 반대쪽 차선에서 차가 오는지 잘 보이지가 않는다. 텅빈 진입로, 누군가 깔아놓은 멍석이라 여기고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춤추러 움직인다. 얼씨구 절씨구, 바퀴를 굴려보자.


춤판이 시작되기 무섭게, 끼이이이이이이익! 내 차머리에 부딪히는 참사를 면한 반대쪽 차선 운전자가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본다. Jesus Christ! 와, 원어민 발음으로 제대로네요. 그나저나 저도 교회 다녀요. 아저씨가 분이 안 풀렸는지 빠아아아아아앙 한번 더 날려준다. 다행히 차량 접촉은 없었으니 멋쩍게 손짓을 하며 좌회전을 마무리했다. 차마 백미러로 보지는 못했지만,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차창을 뚫고 내 뒤통수까지 전달됐다. 


벌렁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슈퍼로 운전하는 동안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모두가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앞에 길이 훤하게 뚫려있든 말든, 뒤에 차들이 줄줄이 기다리든 말든, 나는 그때 앞으로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아들딸 예쁘게 잘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긴 하지만, 지나온 인생의 많은 선택들이 이런 멍석깔이 결정으로 내린 것 같기도 해서 쬐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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