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계절 중에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가을이다. 서늘한 바람, 하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오묘하게 공존하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 덕분에 책 읽기 좋다고도 하지만, 어쩌면 책 읽기 참 힘든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책에다가 코를 박고 시간을 보내기에 단풍으로 물드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책은 아니지만 나는 핸드폰에 코를 박고 살았었다. 아이들과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작품(웹툰 혹은 브런치 글)을 지나다니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보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SNS는 그만보고 나도 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 깨닫고는 허용된 자유 시간의 틈새를 더 쥐어짜 낸다. 이제 나는 미간까지 찌그린 채로 더 본격적으로 작은 화면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작가의 서랍을 뒤적거리며 내 글을 쓴답시고 온라인 세상과 연결된 그 작은 문에서 내 코를 떼지 않았다.
그러다 올 것이 왔다. 세상이 마치 날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걸, 이런 마음으로 제대로 작정을 한 듯. 그 작전이 나에게 제대로 들어 먹혔다. 끝내 나는 얼굴을 들어 올렸고 동화 속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신비로운 빛으로 물든 세상을 보았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거늘, 참으로 온라인 세상의 온갖 화려한 사진과 영상들이 진짜 세상 속 한 그루 나무만 하지 못 하였다. 두 발로 땅을 걸으며 나무에서 떨궈진 낙엽을 주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다양한 모양과 색을 가까이서 본다. 단풍옷으로 곱게 단장한 나무들을 멀리서 지켜보기도 한다. 가까이서든 멀리서든 모든 것에서 감탄이 흘러나오고 글을 써 내려갈 진짜 힘을 채워주었다.
초등학교 때 미술 수업에서는 하얀 스케치북 위에 곧바로 밑그림을 그려내고 물감을 칠했다. 그러다 보니 동그란 팔레뜨를 들고 있는 진짜 '화가'를 떠올리면 그들도 하얀 캔버스 위에 곧바로 물감을 들이대는 줄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유화라는 미술 작업을 살펴보니 그게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작품의 발색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채색 작업을 하기 전 하얀 페인트처럼 보이는 젯소를 하얀 캔버스 위에다가 덧칠해야 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무의미 해 보이는 하양 위에 덧바른 하양.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더욱 '새'하얀 바탕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더해진 색깔들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본연의 색을 뽐내게 된다.
첫째 아이 축구 경기가 있던 가을의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하늘은 바로 이런 캔버스와도 같다. 구름 한 점 없이 드넓은 공간, 거기에 하늘색 젯소가 한치의 틈도 없이 꼼꼼하게 칠해져 있다. 더군다나 여기는 도시도 아니기에 삐죽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나 빌딩의 방해도 없다. 가을 초입의 새파란 캔버스는 오롯이 자연의 색을 돋보이게 할 준비를 마친다.
옆의 사진은 9월 말, 본격적인 단풍이 들기 전 여전히 푸릇푸릇한 사진이지만 이곳의 가을 하늘이 어떤 느낌인지 잘 보이는 것 같아 가져왔다. 보고 있으면 살짝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랄까. 애국가 가사를 보면 가을 하늘이 공활하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텅 비어있고 넓다는 옛 어른들이 보았던 가을 하늘이 저런 느낌이려나 생각한다.
한국에서 살 던 20여 년 전 그때도 고개를 들고 여유롭게 하늘을 본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 같다.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그 시절의 나는 스마트폰은 없지만 지하철을 타기 위해 땅 아래로 후다닥 내려가고, 숨 가쁘게 정류장을 가로질러 조그만 상자 같은 버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전철이든 버스든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살기 위해 서 있느라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을 감상할 정신이 없었다. 그 때 내가 놓쳐버린 지난날의 가을 하늘도 저리 아름다웠을까?
무지갯빛 단풍, 모든 색이 하나의 나무에 보인다. 아름다움의 1/10도 못 담아낸 사진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또 한국에서의 가을 하면 새빨간 단풍나무와 샛노란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라고 하면 나무 하나당 크레용 달랑 하나를 골라 색칠해도 좋을 만큼 내 기억 속 한국 가을의 나무들은 그들의 대표색으로만 그려진다.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듯이 나무도 무심코 스쳐갔던 걸까?
나태주 시인님께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나는 나이 40에 들어서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볼 기회를 얻는다. 가만히 멈춰 서서 나무를 지켜보는데 그들의 단풍옷이 하나의 색이 아니라 찬란한 무지개로 빛나고 있다. 우듬지에서부터 가장 아래쪽에 이르기까지 빨강뿐만이 아니라 주황, 노랑, 그리고 아직 헤어질 준비가 안된 연둣빛에 이르는 이파리와 함께 드넓은 파란 하늘이 이루어내는 조화는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다. 내 고물 카메라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1/10도 담아내지 못해 사진 몇 장만 찍고 눈으로 바라보았다.
40대 아줌마는 감상에 흠뻑 젖어있고 싶지만 눈치 없게 집으로 가자고 독촉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무지개 나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만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집으로 가는 길 맘에 드는 단풍 낙엽을 하나둘 주워갔다. 오롯이 빨간 단풍도 예쁘고 노란 녀석도 예쁘다. 개인적으로는 빨강과 초록, 노랑과 초록처럼 강렬하게 대조되는 색이 나뭇잎 하나에 자리 잡은 아이들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문뜩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스쳐갔던 그 나무들은 여러 가지 색을 아우르며 지냈거늘 내가 그저 빨간 단풍나무, 노란 은행 나무라고 구분하고 지냈던 걸까? 나에게는 다채로운 면이 있는데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면 내 마음도 서운하거늘, 그 나무들도, 어쩌면 나와 함께 지내던 어떤 이들도, 나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많이 속상했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니 만큼, 나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생명들에게 용서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그리고 자연도 사람도 더 자세히 더 오래 보아야 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더 많이 예뻐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 그나저나 꽃이나 자연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이 들어가는 거라는데 제가 지금 그런 거 맞죠? ^^; 나이가 뭐 대수랴, 그냥 맘껏 누리며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