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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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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Dec 19. 2022

나는 돌아버렸다.

무려 360도를!!!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에서 서서 물을 틀어놓고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물줄기를 보고 있었다. 조금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시간도 저 물줄기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는 분명 첫째 아이의 학교 친구를 아파트 수영장으로 초대해서 플레이 데이트를 함께 할 정도로 날씨가 무더웠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그날 최고기온은 34도) 지금은 불과 일주일 차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침 기온이 뚝 떨어져서 (오늘은 9도!!) 서늘한 가을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날씨뿐만 아니라 달력도 이미 두 자릿수 10월로 바뀌어 있고 아이들의 소아과 정기검진은 이미 2020년 예약을 마친 상태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가을부터는 시간이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가....아니 사라져 버린다. 무서울 정도다. 징검다리처럼 새 학기, 핼러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한 달에 하나씩 넘기다 보면 이번 해와 영원히 작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을 코 앞에 마주하게 된다.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버리는 매정함 때문에 시간이 물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낭비하지 말라는 문맥에서 시간이 물에 비유되기도 한다. 20대 초반의 나의 시간은 콸콸콸 틀어놓은 수돗물이었다.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헤프게 시간을 썼던 그 시절 나의 평범한 주말을 재구성해보면 판타지 소설급으로 비현실적이다.




토요일 강남역 1시 약속.


일단 약속시간 2시간 전 즈음 뭘 입을지 고민을 하면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연지곤지 화장도 하고, 기분이 내키면 머리까지 고데기로 말아서 준비해야지. (지금은 세수라도 하고 나가면 다행)


가방은 지갑, 핸드폰, 화장품 몇 개, 소설책 하나 정도 들어갈만한 가방으로 가볍게 메고 나가자. (지금은 기저귀, 물티슈, 여벌 옷, 애들밥, 간식, 장바구니 최소 2개에다가 아기띠에 유모차까지 가뿐(?)하게)


약속 시간 1시간 전 즈음에 느긋하게 집에서 출발~ (지금은 약속시간 30분 전까지 청소, 빨래, 설거지 중 하나를 하다가 시계를 보니 시간이 빠뜻해서 정신없이 뛰쳐나가기 일쑤) 


전철 탈 때는 멍 때리거나 책 읽기로 시간을 때울 수 있어서 좋아 (지금은 무조건 운전대 잡고 정신 차리기! 약속시간 빠뜻할 때는 레이싱카가 따로 없다)


지오다노 앞에서 사람 구경하면서 핸드폰 힐끔힐끔 쳐다보다 보면 약속시간 돼서 친구랑 꺅꺅! 거리며 만남 ㅋ(여전히 사람들과의 만남은 기분 좋지만, 꺅꺅! 거릴 힘은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발랄함 제로) 


서울 땅은 거기서 거기니까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묻는 안부라기보다는 데이트 분위기에 들떠서 오늘 뭐 먹을까? 어디 가볼까? 말하면서 장소를 이동해야지. (웃고 떠들고 팔짱 끼고 어깨동무하고 많이 웃기면 찰싹 한대 치기도 하고 함께 할 장소를 탐색하며 걸었던 때가 대체 언제인지...가물가물)


점심은 느긋하게 메뉴를 고르고 앞에 앉은 사람과 찬찬히 눈 마주치며 분위기도 음식도 모두 즐기며 먹어야지 (지금은 아이 동반해서 식당에 가다 보니 애들 밥 먹이느라 두리번두리번거리다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도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기 일쑤)


그 다음 일정은 디저트 먹으러 커피숍 갈까? (지금은 자유부인이 된다 해도 양심상,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상 1일 1탕으로 제한하는 중)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면서 서너 시간 때워도 맑고 투명한 수돗물 같은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그때 그 시절~ 그립도다!




엄마가 된 나의 시간은 더 이상 수돗물이 아니고 레모네이드 정도로 농도가 짙어졌다. 글을 쓰는 초반에는 우리 집 냉장고에 자리 잡은 새까만 정옥고라고 하려다가 아이를 셋 이상 키우거나, 아이들 키우며 일까지 해내는 슈퍼맘들도 계시는데 꼴랑 애둘 키우는 전업 주부인 내가 함부로 주름잡아서는 안될 것 같아 깨갱하며 꼬리를 내렸다. 그녀들에 비하면 여전히 나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묽은 농도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근데 나는 현재 내가 레모네이드라는 게 그다지 맘에 들지 않은가 보다. 내 마음에 삐쭉삐쭉 불만이 튀어 오른다. 20대 시절처럼 수돗물을 속 시원하게 콸콸콸 틀어놓으며 혼자만의 여유를 하염없이 누리고 싶다고! (자유부인 시켜달라규) 이왕 불순물이 섞여버린 김에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레모네이드가 아니라 끈적끈적한 정옥고나 되어버려라! 그렇다고 애를 하나 더 낳겠다는 건 아니고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바쁨 한 숟갈을 푹 퍼넣고 싶다.


원제: 시간의 농도_2019년 10월 3일 일기



페이스북에 올려놨던 (어느새!!) 3년 전의 일기를 꺼내보았다. 저 때만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감염병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그로부터 2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리라는 걸 몰랐었다. 같은 나 자신이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의 스크루지 유령처럼 한 걸음 떨어져 나를 바라보니 기분이 묘하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를 계기로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180도 뒤집혔을지 모른다. (후유증을 얻은 안 좋은 경우도 있겠지만 ㅠㅠ)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변한 이들도 많다고 본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을 앞에 두고 겸손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지혜를 본다. 꾸준히 글을 쓰거나, 영상을 올리거나, 회사에서 실적을 올리거나, 집을 사거나, 아이들과 더 많이 놀어주거나, 성경 통독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각자의 바쁨을 한 숟갈 넣어 시간의 농도를, 그리고 삶의 밀도를 높여냈음을 보게 된다.  


일기를 읽으며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난 현재의 나는 내가 돌아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라면 180이 아니라 무려 360도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일상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이제는 초딩과 유치원생이 된 아이들에게 쩌렁쩌렁한 사자후 날리는 실력이랄까 ㅜㅜ 당장 군대 조교로 스카우트될 판) 아내와 엄마로 허덕이며 살아가는 삶. 더 바삐 살아보자고 다짐했건만 교과서에 평생 남을만한 역사적인 시간을 통과했음에도 그다지 부지런하지 못했던 개인의 시간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3년 뒤의 내가 똑같은 아쉬움을 다시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도 발행 버튼을 눌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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