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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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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an 03. 2023

보드 타러 갔다 병에 걸리다

코로나? 골절? 타박상? 근육통? 모두 아니다.

이전 글에서도 몇 번 언급되었듯이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남한 땅의 4배 정도 되는 엄청난 땅덩이로 한국에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하면 떠올리는 두 도시,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만 해도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서 6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땅이 너무 넓어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좋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이글거리는 사막부터 태평양을 감싸 안은 따스한 해변, 고개를 90도로 꺾어야만 우듬지가 보이는 거대한 레드우드(침엽수림) 숲까지, 스펙트럼의 양 끝을 아우르는 다양한 자연경관이다. 


(좌) 데스 밸리 (가운데) 산타모니카 비치 (우) 뮤어우즈 내셔널 파크: 모두 캘리포니아에 있어요


게다가 미국은 뉴욕주의 맨해튼 정도 빼놓고는 전반적으로 한국의 외곽 지역과 유사한 인프라 수준이라 동네에만 머무르면 딱히 할 게 없는 딱한 사정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가족으로 살게 되면 여름에는 산이나 바다로 캠핑을 떠나고, 겨울에는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산속의 리조트로 떠나게 된다.

출처:https://www.piscoandbier.com/lake-tahoe-ski-resorts-map/

2주 전 겨울방학을 맞이한 우리 가족은 집에서 서너 시간 정도 걸리는 리조트로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 여파로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처음 가는 것이니 참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스노보드 그룹 레슨을 받았었는데, 감이 올랑 말랑 할 때 즈음에 레슨이 끝나야 해서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2022년에는 우리가 리조트를 가게 된다면 스노 보드 개인(!!) 레슨을 생일 선물로 해달라고 부탁해 둔 상황이었다. 연말이라 워낙 피크 시즌이기도 하고, 계획을 막바지에 세우는 바람에 우리가 예약하고 싶은 리조트의 알뜰형 레슨들은 이미 솔드아웃이었지만 워낙 이 근처에 크고 작은 스키장이 밀집해 있어서 우리의 일정에 맞춰 다행히 레슨 하나를 예약할 수 있었다. (레이크 타호라 불리는 이 지역에는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대형 스키장에서부터 가족이 운영하는 소형 스키장까지 10개 이상 모여있다.)


우리가 머무는 기간 내내 눈/비가 예상되어 여행을 가기에 최상의 조건은 절대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 4륜 구동 자동차를 렌트해두고 타이어체인 구매하고 (돈돈돈 ㅠㅠ) 혹시나 도로에 발 묶일 상황을 대비하여 간식거리를 잔뜩 사두며 (또 돈돈돈 ㅠㅠ) 여행 준비를 해두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현실적인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비록 40살 아줌마일지언정 무언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기대를 제일 위에 꾹꾹 장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말 겨울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야심 차게 개인 레슨까지 예약했겠다, 4인 가족으로 처음 떠나는 겨울 여행이니만큼 기존에 갔던 것보다 조금 길게 4박 5일 일정으로 잡게 되었다. 첫날과 마지막 날은 이동으로 날려야 하고, 가운데의 3일이 리조트에서 본격적으로 즐기는 날이었는데 우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기 예보가 살짝살짝 비껴가면서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할 수 있었다. 


첫날에 안전하게 이동하여 호텔 도착! 둘째 날에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중소형 리조트로 셔틀버스를 타고 건너가 아빠와 아들이 맛보기로 보드 깔짝깔짝대기! 대망의 셋째 날에는 마침 해가 쨍하고 뜬 귀한 날이었는데 렌터카를 타고 조금 큰 리조트로 이동하여 엄마와 아들의 스노 보드 개인 레슨을 받는 일정까지 완벽(?) 소화해 냈다! 


어렸을 때는 스키장에 가면 뭐랄까 조금 춥고 고생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어른이 돼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장갑이랑 부츠, 엉덩이 보호대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해둘 수 있어 맘이 편했다. 아님 여기 캘리포니아 날씨 자체가 조금 덜 추운 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춥지도 않았고 초보자임에도 불구하고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는 건 역시나 재밌는 시간이었고, 여건만 허락된다면 야간까지 머물러서 뽕을 빼도록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당장의 내 욕심은 살짝 눌러두고 가족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런 사고 없이, 타박상이나 골절도 없거니와 호텔로 돌아와서는 뜨끈뜨끈한 목욕으로 몸을 풀어주며 미미한 근육통마저 느끼지 못했다. 무탈함 이상으로 행복감에 둘러싸여 3번째 날까지 마무리하게 되었다. 




4번째 날이 밝았다. 눈이 잔뜩 쌓인 곳에 왔긴 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엄마, 아빠,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다리기만 한 둘째에게 너무 미안해서 오늘은 온전히 아이들 위주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썰매도 타고 눈사람도 만들어 줘야지 생각하며 시작된 그날. 


아침을 먹는데 약간 속이 약간 메슥거린다. 오늘 바지 안에 히트텍 내복 대신 도톰한 기모 타이즈를 입었는데 그게 너무 짱짱해서 배를 쪼이나? 생각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아줌마가 되면 다들 이해하시죠? 임신 출산 이후 청바지에는 선뜻 손이 안 가는 우리들의 현실을 ㅋ) 그렇게 밥을 조금 챙겨 먹고 호텔 근처, 겨울에는 눈썰매장으로 변신한다는 골프장으로 향했다. 


하얗게 펼쳐진 눈 밭을 보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는데 마음만큼 (소화가 잘 안 되는 몸뚱이에서는) 흥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썰매 이리 끌고 저리 끌고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아이들과 놀기 시작했다. 


근데 중간중간 썰매에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머리가 핑~핑~돌아버린다. (하하하, 누가 돌아버린 여자 아니랄까 봐 ㅋ 얼마 전에 브런치에도 나는 360도를 돌아버린 여자라며 자백하지 않았는가) 여자라면 빈혈은 종종 겪을 수 있는 증상이고, 더군다나 나는 저혈압인 편이라서 이런 증상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빈혈이 없었긴 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지러운 썰매 타기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나는 오자마자 먹은 것을 게워냈다. 뒤늦게 알았다.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비실거리는 몸뚱이를 화장실에서 질질 끌고 나와 일단 내 복부를 옥죄인 몹쓸 (하지만 따뜻하였소 ㅜㅜ) 기모 타이즈부터 벗어던지고 헐랭이 잠옷 바지로 갈아입었다. 물에 젖은 김처럼 침대에 널브러져서 생각했다. 열도 조금 나는 것 같고, 어지럽고 구토까지 한 거 보면 코로나일까? 생각을 하는데 불현듯 스치는 또 다른 병이 있다. 


고산병 (Altitude Sickness)


구글 검색에 들어가니 증세가 내가 겪은 것들과 유사하다. 두통, 현기증, 식욕부진, 탈진, 호흡곤란 등등. 검색을 오래 할 수도 없어 신랑과 아이들을 호텔 수영장으로 보내버리고 나는 침대 위로 장렬히 전사하듯 쓰러져 잤다. 잠을 자고 조금 제정신이 돌아와서 이곳의 해발고도를 검색해보니 여기 레이크 타호도 심각하진 않아도 자칫 고산병을 겪을만한 높이다. 약 7000피트, 그러니까 2100m 정도 높이에 있으니까. 참고로 어떤 블로거가 한국의 국내 스키장 고도를 정리해놓으셨던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스키장의 전라도 무주의 덕유산의 정상이 1500m였다. 


동화 같은 눈 덮인 세상

몸이 멀쩡하게 버텨내다가 첫째 날 이동, 둘째 날, 셋째 날 정신없이 운동하고 나의 과업, 스노 보드 개인 레슨 마치나니 긴장이 탁 풀리면서 ㅋㅋㅋ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넷째 날에는 훅~가버린 케이스라고 추측한다. 거기에다가 애들이랑 놀아보겠다고 기모 타이즈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까지 했으니. 허허허. 말 다했지. 고산병을 없애는 방법으로 몇 가지가 있는데 휴식...... 그리고 하산이 제일 확실하단다 ㅋ 다행히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게 되니 나는 골골대며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정말로 산을 내려오기 전까지 현기증과 더부룩한 속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보드 배우러 왔다가 고산병에 걸릴 줄이야. 다음에 올 때에는 아무리 내 맘이 배움에 대한 열정이 펄떡펄떡 뛰어도 40대 저질체력 아줌마라는 걸 인지하면서 속도 조절을 해야겠다. 개인레슨 마치고 야간까지 뻐띵기면서 추가 연습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아프기냐. 서글픈 현실을 마주하자니 마음의 병까지 덤으로 가져갈 듯. 


에잇! 평소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꾸준히 운동하자. 2023년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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