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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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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an 20. 2023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처음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거쳐야만 하는 마일스톤이 있다. 뒤짚기, 앉기, 말하기, 서기, 걷기, 달리기, 기저귀 떼기, 잠자리 분리, 읽기, 쓰기, (사람을 사람같아 보이게) 그림 그리기 등등. 어떤 부지런한 엄마들은 꼬박꼬박 기록을 해놓을테지만 나는 그런 성격은 되지 못한다. 언제, 어떻게 해낸건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반짝거리던 순간의 감정만큼은 선명하다. 뭐랄까, 에너지가 빠져 삐쩍 말라붙은 엄마로서 내 삶이 마법처럼 한순간에 풍성해지는 느낌이랄까. 이 세상에 태어난 작은 생명체이기에 그냥 해내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내가 그 반짝거리는 찰라를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간질거리곤 했다.


품 안의 작은 아기였던 녀석은 최근에 생일이 지나 만 9살이 되었고 어느덧 이 세상에 태어난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채워간다. 이제 내 가슴팍까지 올 정도로 자라났고 학교에 다니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족들과 부대끼며 여전히 자라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최근 나는 부쩍 커버린 아이의 첫 경험들에 결코 다정하지 못 했다. 다음주에 있을 다글다글 독서모임을 위해 폴란드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르카추크의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라는 책을 읽는 중이다. 엊그제 단톡방에서 폴란드에 살고 계신 정현님이 원제에 있는 Czuły가 '예민한'의 뜻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이 부분이 '다정한'으로 번역된 것이 재밌다고 나눠주셨고 이 폴란드어가 딱 여기에 적용될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아이가 이루어내는 첫 경험에 예민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기쁨과 감사보다 아이를 다그치는 일이 많았던 지난날. 단지 나이가 조금 채워졌다는 이유로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아이가 하나하나 세워가는 마일스톤을 놓치고 있다는 죄책감이 내 마음을 덮었다. 알고는 있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고단함에 치여서인지, 그 죄책감이 있지 않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처음으로 똥 쌌어."


그깟 화장실 다녀오는 게 대수랴. 하지만 아이는 자기 인생에서 그 일이 있기 전과 후로 나누어도 될 정도로, 처음으로 해낸 의미를 느꼈나보다. 그래서 엄마인 나에게 '똥'이라는 주제가 좀 부끄러울지라도 ㅋ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아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가 첫째 아이의 나이였을 때는 변기에 내가 눈 똥도 못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쪼그려 앉는 화변기가 많았던 학교 화장실이나 공중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는 건 상상도 못했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소변은 참새를 잡는다고 하고, 대변은 독수리를 잡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독수리 사냥은 언제나 집에서만 이루어졌다. 사냥을 성공하려면 집중을 해야하는데 밖에는 사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에 퐁당 빠지는 소리를 들어버리면 어떡하지, 고약한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뿌리게 되면 어떡하지 등등. 나랑 일면식도 없지만 내 독수리 사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며 내 독수리 사냥은 최대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의식으로 감추어 두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변비약을 잘못 복용해서 학교 화장실, 친구들에게 들킬 순 없어서 교사 화장실에서 공적인 독수리 사냥을 치르게 된다.) 여튼, 내가 그 나이 때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낸 아이가 자랑스러웠고, 어떻게 해냈을런지 궁금해졌다.


혹시 친구들이 화장실에 바글바글할지도 모를 쉬는 시간에 갔니? 남자 화장실이면 너무 티날텐데 괜찮았어? 애들이 놀리지는 않아?

응, 괜찮았어. 내가 이번주에 V.I.P. (Very Important Person)잖아. VIP는 원하는 쿠폰을 2개 뽑을 수 있는데 하나는 Lunch Bunch, 친구들과 영화보면서 점심 먹기 쿠폰을 골랐고, 다른 하나는 No Work, 애들이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아무거나 할 수 있는 (윙??? -,.-;;;) 쿠폰을 골랐거든.


담담한 목소리로 수업 시간에 혼자서 조용히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예전에 느꼈던 간질거림이 올라왔다. 마침 우리 아파트로 진입하는 굴곡진 굴다리 길에 들어서인지 그 감각이 더 생생했다. 이렇게 아이는 크고 있구나. 감사하게도 어제 나는 마일스톤 한 조각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다정하게 크고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여 가기를 기도한다.     



커버 이미지: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ys4najRQR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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