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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Oct 06. 2024

일본에 살아보고 싶어
いつか日本に住んでみたい

2024년 9월 - 일본어

나에 대한 두 번째 단서이자, 새로운 도전은 바로 일본(어)이다. 이번 조사(?)를 하면서 일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더듬더듬 되짚어봤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게 뻗어있고 맘에 새겨진 연도 깊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우리 집은 맞벌이, 엄마는 약국을 하셨다. 약국은 보통 8시 즈음에 마감을 하는데 종종 손님이 없는 날은 일찍 문을 닫고 근처에서 외식을 했다. 놀부 부대찌개와 정성본 샤부샤부를 비롯하여 즐겨 찾던 메뉴 중 하나는 바로 회전초밥. 1997년 즈음이었나, 약국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회전 초밥집이 생겼다! 약국의 위치가 서울 번화가 한복판이었던 걸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꽤나 획기적인 시도였을 듯하다. 


눈앞에서 요리사가 정성스레 만든 초밥이 레일 위에 귀여운 기차처럼 줄지어 나오는 모습, 다 먹은 초밥 접시를 높이 쌓아 올리는 재미, 버튼만 누르면 따뜻한 녹차를 바로바로 마실 수 있는 편리함까지! 한창 식욕이 왕성해지는 중학교 즈음이라 엄마랑 단 둘이 외식할 기회가 생기면 자주 그곳을 찾곤 했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노오란 날치알과 단짠 소스가 일품인 장어 초밥을 좋아했는데 음식에 대한 호감 덕분에 이웃 나라 일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를 35년간 식민 지배한 천하의 나쁜 놈들!!! 특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이라면 알 텐데, 해방으로부터 반세기도 지나기 전이라 그런지 아주 어릴 때부터 과격한 메시지에 많이 노출이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 있던 흑백 백과사전에 수록된 고문 사진들, 식민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무슨 영화일 텐데 비디오 케이스 뒤편에 그려져 있던 자극적인, 차마 여기에 글로 못 옮길 장면들, 독립 기념관 같은 박물관에서 마주친, 당시를 생생하게 재연해 놓았던 마네킹들이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음식으로 살짝 열린 호감은 만화로 꽉꽉 채워나갔다. 만화방에서 꾸준히 단행본을 빌려오고, 투니버스라는 케이블 채널에서 여러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마음속) 취향 책장 안에 '꽃보다 남자''미녀는 너무해''환상게임' 등 순정 만화 감수성에서부터 '엔젤 전설'이나 '괴짜 가족'같은 낄낄 웃기 좋은 코믹물까지 골고루 채워나갔다. 하지만 일본 문화에 흠뻑 빠지려다가도, 이토 준지 작가의 작품이라던지 고등학교 때 일파만파 유행 탔던 변태적인 '엽기물'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엇, 이거 너무 선 넘는 거 같은데.......??!!' 하는 기괴함 때문에 일본 오타쿠가 되는 것에 브레이크가 걸리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서 춤에 빠져 살고 연애하고 간신히 학업을 따라잡느라 여유 시간이 거의 없어져 버린다. 성인이 되었다는 의식 때문인지, 만화책을 보는 빈도가 확 줄어들고 그나마 시간이 나면 소설책을 종종 들여다보긴 했는데 신기하게도 이때 읽은 소설책 중 상당수가 일본 소설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소설들은 다른 나라 작품들과 달리 문체가 간결하고 산뜻한 맛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문장이 술술 읽히는 편안함 때문인지, 가뭄에 콩 나듯 생기던 20대의 여유 시간에 그나마 읽었던 소설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죄다 일본 작가님들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도 있겠지만 이때 일본 소설이 유행했던 거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종종 일본 소설을 읽으며 살아가던 나는 스트릿 댄스에 빠져 대학교 2학년 즈음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댄스 대회 Japan Dance Delight을 구경하고 댄스 클래스를 듣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지경까지 되었다 ㅋ; 지금은 한국의 댄스씬이 국제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힙합을 배우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미국의 스트릿 댄스 문화를 먼저 들여오게 된 일본을 통해서 한국의 댄스씬이 발전해 나가는 중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댄서들을 초대해 오기에는 비용면에서 부담이 크니까, 가까운 일본에서 댄서들을 초대해서 워크숍을 개최하고 그들의 대회나 파티 문화를 들여오려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의 댄서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경제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10년 정도 앞서 있었던 일본의 댄스씬에서 보았던 충격은 여전히 인상 깊다. 앞서 언급한 Japan Dance Delight은 동경과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개최되는 춤 대회이다. 커다란 돔구장에서 스탠딩으로 봐야 하는 형식인데 참가하는 팀도 많고 그것을 관람하려는 사람도 커다란 경기장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너무 많았는데 비싼 티켓이 모두 매진되었던 게 기억난다. 일본의 국민성이라고 일반화시키긴 힘들 수 있지만, 특정 문화에 대해 집요하고 꾸준하게 파고들어 그것을 하나의 단단한 장르로 성장시키고 건강한 Local Market을 형성시키는 점은 배울만한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인 정신이 투철하다고 할까나?  




30년가량 참으로 가늘고 길게 일본에 대한 마음을 쌓아갔다. 음식에서, 만화, 춤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일본에 가려면 비행기 1-2시간으로 뚝딱 갈 수 있는 한국에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일본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언젠가 내가 애정하는 외국에 여행자가 아닌, 거주자로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20세기 초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했고, 21세기 초 정치 철학을 전공한 브런치 작가(이자 사랑하는 동료 작가 <3) 진민님은 자신의 책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의 서문에서는 '외국어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으로 가는 계단이고 다른 세계로 난 창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이 40이 되어 일본어를 품어 나의 세계가 확장되기를 꿈꾼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공부하는 중이다. 울렁증이 있는 영어와 달리 일본어를 배울 때에는 기분 좋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가까운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엉뚱한?) 일본어를 배우려는데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기회를 많이 만난다. 우선, 아이들 학교에서 우연히 만난 재일교포 3세 K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일본어 동화책,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방과 후에 30분 정도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게 하고 우리들은 교실 밖에 있는 런치 테이블에 앉아 언어 교환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이민진 작가님의 파친코에 나오는 솔로몬과 비슷한 상황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으며 겉과 속이 모두 일본인이지만 초록색 한국 여권을 가지고 공항을 오고 간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한국어로 본문을 읽어주고, 그녀는 똑같은 내용을 일본어를 읽어준다. 그리고 원어민이 읽어주는 본문을 듣고 자신의 세계 너머의 세계가 궁금한 중년 여성들이 언어를 바꾸어 더듬더듬 읽어나간다. 이번 가을이 3학기 째이다. 나이가 찬 두 아이의 엄마들에다가 복습할 시간이 부족하여 진도가 너무나 느리다. (한 학기에 2페이지 정도?) 책 한 권을 다 마치려면 70살 정도 돼야 할 거 같다 ㅋㅋㅋㅋㅋ 이번 학기에는 스리슬쩍 넘어갈까 했는데 마음을 다잡고 월요일마다 만나기로 스케줄을 잡았다. 


그리고 이번 가을부터는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자매님과 일본어 성경 읽기를 하고 있다. 평소에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없던 자매님이었는데 알고 보니 20년 넘게 일본에서 살다 오셨다고 하셨다! 함께 일본어로 성경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찰나, 마침 또 다른 자매님을 우리 동네에서(원래 여기에서 30분 이상 운전해서 나가야 하는 곳에 살고 계심)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대학교 때 부전공으로 일본어를 하셨다는 게 아닌가?!! 할렐루야~ 그래서 이렇게 셋이 모여 온라인으로 일본어 성경을 읽어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셀에 최근에 들어오신 부부가 있는데 여기는 한국 이민 교회인데 마침 아내 분이 일본 분이시고, 아이는 내가 교사로 섬기는 영아부로 나오게 되었다! 성경에서 배운 일본어가 실용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배운 조각들을 간간히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꺼내 쓰고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맞춰주시는 인생 퍼즐은 그 조각이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나를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출중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동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까지 보내주시니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일본어를 어디서 어떻게 써먹게 되려나 기대감이 든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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