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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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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un 16. 2020

To the Lost World

참 새까맣다. 그리고 빼빼 마르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만일 신이 우리들을 만들 때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도 미리 정해주신다면 나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그냥 묻혀지내라는 것이 아닐런지......나 하나 정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한들, 누구도 선뜻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잔인한 평범함. 그것이 바로 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세상엔 나 같은 녀석이 한 둘이 아니고 잔뜩 있었다. 우리들은 멸치 떼마냥 한 곳에 모여산다. 오롯이 새까만 색깔 때문인지, 아니면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일률적인 평범함 때문인지 바글바글 모여있지만 우리가 사는 공간은 적막했다. 여느 때처럼 고요했던 어느 날, 내 옆의 한 녀석이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저기........너 지금 어디가니?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거야?" 

나의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는 녀석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쉿! 조용히 하고, 방해하지마." 

그의 말 한마디에 단조로운 평범함에 쉽게 금이 간다.

"방해하지 말라니, 왜? 지금 뭘 하려는데......?" 

정이 박힌 김에 망치를 냅다 꽂아야할 것 같아 다급하게 소리쳐봤다.  

다급한 목소리에 간절함이 들어갔는지, 내 질문을 듣고 그는 발걸음을 돌려서 내 앞으로 다가와주었다. 주변을 쓱 둘러본 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너 여기 온지 얼마나 됐지?"

"6개월.......조금 넘었어."

"그럼 알지도 모르겠는데, 미묘하게 우리 주변이 변하고 있다는 거 느꼈니?"

"변하다니, 대체 뭐가......?"

"점점 수가 줄어가고 있는 거, 모르겠어?" 

".........!" 

그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공간이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았다. 과반수는 아니지만 꽤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변해가는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이 때까지 온 것이다. 사실을 맞딱드리자 몰려오는 긴장감 때문에 빼빼마른 내 몸이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잠시 몸을 추스리고 입을 열었다. 

"설마.......실종 사건이야? 유괴? 납치?"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실종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일이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주기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니.......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그럴싸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머리 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일하러 나갔다가 단순히 길을 잃고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고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쭉 지켜본 결과, 사라진 이들은 스스로 여길 떠났던거야."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그를 따라 나왔다. 지금 이 곳을 나간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건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조금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단 하나, 나의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잠깐이지만 그것만은 내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하루는 머리묶는 일로 시작한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것은 신성한 의식에 가까웠다. 잠기운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투명한 분무기에 시원한 물을 채워 분사하면 그녀의 머리카락 곳곳에 안개비가 내려 앉았다. 그 후 그녀는 빗살이 촘촘한 분홍색 참빛으로 물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들여 쓸어내렸다. 엉킨 가닥을 풀어지며 아래로 쭉쭉 뻗어내려가는 머리는 마치 광채를 내뿜는 검은 실크같아 한번쯤 만져보고 싶게 만든다. 머리숱이 풍성해서 였을까, 그녀는 여자들이 흔히 쓰는 동그란 고무줄이 아니라 길다란 일자형 고무줄을 썼는데 고무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머리를 묶곤 했다. 가르마 없이 정갈하게 하나로 올린 머리 가닥을 반대쪽 고무줄 끝으로 빙-빙-빙- 세번을 돌려감았다. 입에 물고 있던 고무줄을 툭 뱉으면 머리끈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야무지게 받아 단단한 매듭을 지어낸다. 나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를 도와 잔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정리해주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는 기분좋은 샴푸향이 흘러넘쳤다. 


정확한 나이는 알수 없지만, 그녀는 무용을 전공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춤을 추고, 방과 후 학원에서 춤을 추고, 개인 연습을 하면서 또 춤을 춘다. 거의 하루 종일, 매일매일, 사시사철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그 때마다 샴푸향을 씻어버릴 듯이 머리에서 땀이 쏟아져내렸지만 나는 그녀가 춤을 추는 것이 좋았다. 특히, 백조처럼 머리를 한없이 낮게 숙이는 것, 목을 길게 빼내며 머리를 돌려 손 끝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머리 하나의 움직임이지만 머리에서부터 목을 따라 척추로, 어깨를 따라 팔과 손끝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언제나 우아하고 강렬한 에너지가 흘렀다. 나는 볼품 없지만, 나의 그녀에게는 기품이 흘러넘친다. 






우리가 살던 곳을 나와서 한참을 걸었다.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제 발로 떠났는지, 그들이 간 곳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어떻게하면 갈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이곳저곳으로 움직였는데 누구도 우리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우리들, 그리고 그 우리 속의 나 하나. 광활한 우주 속에 티끌같은 내 존재감을 생각하니 그냥 떠나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나는 유선전화기 4구 콘센트 앞에 서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콘센트는 소녀의 침대머리에 가려져있다. 이 콘센트의 커버를 열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곳으로 길이 나있다고 한다. 콘센트를 열어보니 안이 새까맸다. 두렵기보다는 고향으로 향하는, 나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첫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 침대 머리 맡에서 뒤척거리는 움직임이 들리면서 익숙한 샴푸향이 은은하게 내려왔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한번쯤은 나의 그녀가 내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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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실핀을 또 모두 잃어버렸다. 

새로 사면 없어지고, 새로 사면 없어지고. 

어디로들 이렇게 사라지는거야! 

이쯤되니까 다들 어디에 모여사는 건 아닌지 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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