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다 채우지 않아도>
나는 다이어리를 초등학교 때부터 써왔다.
그렇지만 한 권을 다 채워본 기억이 없다. 변명 같은 이유를 덧붙이자면 나에겐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것이 한 해를 잘 시작하게 해주는 작은 의식 같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새 다이어리가 주는 새로움에 중독되어 있던 것 같다.
그것이 질리면 새로운 다이어리를 샀던 것 같다. 그렇게 산 다이어리들은 중간부터 비워진 상태로 내 책장 한 구석을 차지했다.
다이어리 시장은 보통 8월부터 바빠진다. 요즘 사람들은 내년 다이어리를 이르면 8-9월 늦어도 11월 초 정도엔 구매한다.
늘 새로운 포맷과 다양한 디자인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것을 보며 나도 새로운 다이어리를 갖고 싶어서 충동소비를 했던 적이 많았다.
비싼 다이어리들을 사면서 무엇에 쓸 것인지 용도를 정하고 사지 않아 사고 나서 몇 장 써보는 정도로 가벼운 낙서종이로 그리고 책장지킴이로,,,
올해 나는 가족들에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로 하였고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비우기 위해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다이어리를 쓰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다 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짐이 나오지 않는 디지털 다이어리로 바꿀 것인지.
고민이 많던 중에 슈타이들 전시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중 한 문장을 보고 나서 내 고민의 해답을 찾았다.
“디지털은 잊기 위해 만들어졌고,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날로그 방식을 결정했고 다 쓴 다이어리들은 비우기보단 모으기로 결정하였다.
아마 나중에 내가 이것들을 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스캔을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위한 보관함을 만들지 않을까?
물론 보관함을 만드는 것은 물건을 위한 물건이 되겠지만 그만큼 추억은 소중한 것이기에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럼 여태껏 다이어리를 많이 구매하던 습관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이게 쉽게 질리는 나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단점) 그래서 쉽게 질리는 성격을 고치고자 나는 작은 여권 사이즈의 수첩들을 사용하기로 했고 그 외 규격의 다이어리들은 다 분해했다.
다행히도 불렛저널용 노트들이어서 특정 형태가 있는 일반 만년다이어리들과는 좀 달랐다.
그렇게 다 분해하고 나니 나는 앞으로 한 5년은 더 쓸 수 있는 속지들을 가지게 되었다.
속지들로 새로운 노트들을 만들고 집에 있는 종이로 표지를 꾸미고 그런 시간이 나에겐 큰 힐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에 내 이야기를 다 쓰기 시작했다.
정해진 규격 없이 마구잡이로 쓰고 붙이고 다 쓰기 전엔 새로운 다이어리는 쓰지 않기로 하면서 나와 약속을 한 것이다.
이것을 지켜나가면서 나는 또 한 번 성장했다.
아직 비움이 어렵지만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물건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