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직면하려 해본 적 없는
진즉에 한쪽 구석으로 밀어둔,
밀어두었단 사실조차 까먹은지 오래인
낯선 단어 "본질"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린 왜 이런 경험들을 해나가는 걸까?
경험이란것 자체가 왜 필요할까?
사람의 몸은 왜 받았을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걸까?
알수가 없다.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화두가 어디있을까?
거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이 본질에 대한 얘길 꺼내고,
나는 이 답을 찾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살핀다.
반응은 정말 단순히 몇가지로 나뉜다.
"오~ 그렇구나." 끝-
혹은
"그래 그렇지 그건 모든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야~ 나도 궁금해~" 라고 말은 하면서
바로 다른 대화의 주제로 넘어간다.. 본질은 제쳐둔채.
"뭔소리야?" 라고 말할 것 같은 사람에겐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이미 깨달은 이들이 깨달은 뒤에 쓴 책들을 읽는 것도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성경도, 불경도, 원불교 교전도.. 뭐랄까 머리론 알겠고 맞는데 내가 깨쳐 얻지 않은 것을
교과서 공부하듯 우겨넣은 느낌이랄까.
그 부작용도 생겨났다.
어떤 것을 경험하든 너무 그 깨달은 성인들의
말씀에 빗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래서 이랬고, 저것은 저래서 옳고 그르고" 등등.. 자꾸 맞다 틀렸다를 분별하는 마음이 생겼다.
옳은 길, 바른 길로 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고 식욕,수면욕 같은 욕심이 많은 게
나의 더러운 마음버릇 같았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며 스스로 굉장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자괴감을 인식한 나이는 불과.. 10살도 안된 유년시절부터였다.
"본질"이란 주제가 나와서 말인데
나의 뿌리인 "부모님"과의 경험으로 돌아가서 얘기해볼까?
지금도 수도 없이 생각난다.
원불교 성직자인 아버지께 들었던 말들, 함께 읽자며 소리내어 읽으라 시키신 그 수많은 깨달음의 말씀들..
이렇게 말하니 마치,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생각난다.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고승들과 하루종일 어려운 불경공부며, 영어공부며, 참선이며 7살 남짓의 나이부터 환생한 성인이라며 데려가
아이로서 궁금할 모든 욕망을 뒤로 한채 수행에 전념하고 만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삶.. 어쩌면 아빠는 나에게 그런 깨달은 존재가 되길 원하는 욕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마흔살에 첫애인 언니를 보셨을땐 그 나이에 아이를 가졌단 생각에 감개가 무량하게 너무너무 행복해하셨고 언니를 그렇게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나도 아빠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은 분명 있지만 그보단.. 나에겐 늘 뭔가 요구하고, 뭔가를 이루길 욕망하셨던 기억이 난다.
한 8살때였나.. 눈이 가득쌓인 시골집 마당에 동그라미를 그리고선 그것이 원불교에서 법당에 놓는 일원상 같다 생각하고선 아빠에게 뛰어가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아빠! 아빠! 일원상은 마음공부 구슬이야!"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사람들이 집을 방문할때마다 아빠는 저 8살 먹은 녀석이 뭐라 했는 줄 아냐며 그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자랑하시곤 했다.
아빠 생각엔 본인이 천재를 낳았다 기대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공부천재, 운동천재가 아니라 아빠가 그토록 원하는 마음공부의 천재!
저 애는 큰 깨달음을 얻을거야. 큰 도인이 될거야. 아마도 그 생각이 아빠 뇌리에 박혀 나에게 유독 엄하셨던 게 아닐까?
그때의 나는 그게 참 힘들었다. 아직도 여덟살때의 고뇌와 어려움이 선명하게 기억에 난다.
머리는 그게 늘상 들었던 깨달음의 말처럼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나를 압박했지만 가슴에선 그게 싫고 아팠다.
나는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아빠의 조건없는 사랑과 응원을 받고 싶은 8살 꼬마아이였을 뿐.. 29살인 지금 나에겐 그게 결코 아름다웠던 기억이 아니다.
그게 단순한 유년시절의 에피소드로 끝났다면 웃어 넘길 일일 수 있지만, 내가 23살이 될때까지도 아버지는 그 마음을 놓지 못 하셨으니까..
내가 19살에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했을 때도,
지휘를 공부하고 싶다 했을 때도,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다 했을 때도,
내가 나이가 먹고 점점 아버지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끝마다 받아치며
노발대발 화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디지털대학이라도 가서 마음공부 지도자과정을 공부하는게 어떻냐고..
여태까지 니가 해온게, 제대로 하는게 그것 밖엔 없지 않냐며 본인 딴에는 그저 "제안"이라며 말을 했던 분이다.
결국 그게 어디까지나 본인의 욕심이었음을 스스로 깨달아 놓으신게 아니라, 희귀병(파킨슨과 유사한 뇌핵상성마비)이 아버지를 집어삼켜 더이상 그런 "제안"조차 할 수 없을 몸의 상태가 되었을 때도 그 뒤틀린 집착은 끊이질 않았었다. 요양병원생활이 1년이상 된 시점에서 치매가 오고 선망증상이 심해졌다 나아졌다를 반복하면서 부터 더이상 그 집착과 자조가 가득찬 감정을 상대에게 쏟아내지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을 25년을 보고 살았으니 그 기억을 그저 미숙했지만 "사랑"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도 이해된다.
단순히 사랑이었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과한 억압이었다. 아빠가 그토록 외쳤고 가르쳤던 "모든 위기는 마음공부의 기회"라고 받아들이기에 너무 과한 역경이라고 느껴진 적이 많았다.
내가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마음공부의 길과 아버지가 실제로 보인 모습의 격차. 그 모순에서 나는 정말 지긋지긋한 혐오감까지 들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쉽고 단순한 방법은 없었을까?
그렇게 괴롭고 어렵게 자신을 가두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행을 하는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고 함께 하며 답을 찾는 방법.
많이 들었던 말인데, 사람들은 내가 정말 빨리 이 정신적 가치를 깨닫고 그들과 어려운 명상수련캠프를 같이 하는 열댓살 먹은 한참 어린 나를 보며 "대단하다, 부럽다 너무 이상적이다" 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왔다. 뭐 하긴 초딩때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겨울이고 여름이고 마음공부 수련원을 다녔으니..
..
진짜 단순하게 생각했을때 한편으론 의문이 든다.
난 태생부터가 원불교 수련원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계속 수행만을 이어가던 부모님과
수련원에서 그들의 스승이었던 분의 등에 업혀 아기적부터 선법을 듣고, 보고, 자라난
완전 "오리지날 정신수련 베이비"인데.. 태어나 자라서 성인이 된 모든 순간까지 부모님을 따라 안 가본 명상단체가 없고, 안 만나본 정신적 스승이 없고, 안 참여해본 명상프로그램이 없을만큼 온갖 지식과 경험을 다 쌓았는데, 왜 난 정작 깨닫지 못했지? 부모님이 거기 쏟은 정성의 시간들이 정말 억울할 정도다. 아니 왜 천재교육이라 하잖아.. 조기교육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어려서부터 그 환경에 자연스레 노출되고 어울리고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야되는 거 아냐?
그걸 공부나 운동으로 했다 치면 최소 서울대를 가든, 국가대표 선수가 되든 둘중 하나는 됐을 것 같은데 왜 정신적인 면에서 나는 대각을 이루지 못했지? 깨달은 스승이 되질 못한거지? 반은 진지하게, 반은 우스갯소리로 여전히 질문을 던져본다.
..
그러나 나는 나를 부러워했던 그 모든 어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 나약한 영혼일 뿐이었다. 마음공부 한다며 고생고생은 하시는데 부모님은 늘 하루에 기본 3번 정도는 싸우기 일쑤고, 싸우기 시작하면 기본 30분-1시간 이상은 큰소리로 "니가 하는 마음공부가 맞니 틀렸니" 두 눈을 치켜뜨고 서로를 노려보면 맞서던 부모님이 여전히 떠오른다. 분을 삭힐수 없었던 부모님이 자녀들이 안 들을 때 싸우자며 자정이 지난 밤에 거실에서 싸우신 적도 많았다. 그 때마다 언니와 부둥켜안고 소리죽여 울었던 밤이 참 많았다. 우리에게 "채식을 해야해! 육식을 하고 싶은건 잘못된 욕망이야!"부터 시작해서 그 분들이 옳다고 정해둔 대안교육적 틀이 참 많았다. 늘 그 틀에 어긋나지 않게 훈육하기 일쑤인 그 모습들이 종국에 놓고보면 그저 그들도 마음공부를 빙자한 내면의 정리되지 않은 상처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난 마음공부 천재였던게 아니라 그저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이 필요한 어린애인데 그걸 받을 수 없자,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고 떠받들어 마지 않는 마음공부를 잘 하는 듯 보여 칭찬받고 싶었던 것 뿐이다.
이런 부모님을 만나 살아온 유년시절, 청소년시절이 나에게 남긴 의미는
부모님이 성직자이든 아니든, 마음공부를 한다고 돌아다니든 아니든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아픈 그림자를 용기있게 돌아보고 품어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채 그저 명상과 마음공부가 주는 순간적 달콤함과 약간의 해방감에 취해 계속 그 것을 원하며 아름다운 면만 보려 하는 것은 결국 회피이다. 그림자는 계속 따라 붙을 것이고, 그것에 솔직하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삼켜진다. 어둠은 더럽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냥 어둠, 무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직면하기에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신을 못나게 바라볼까 걱정하는 체면과 위신을 죽어도 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너무나 안타깝고 또 웃기다.
그토록 입만 열면 외치던 깨달음, 수행같은 것들이..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법당에 앉아 경건하게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몇년간 108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성욕과 식욕을 더럽게 여기고, 부정했다. 사람들의 인정과 욕망을 갈망하는 면이 있음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아닌척 살아갔다. 종국엔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라는 수치심에 대인기피증을 겪고 딸들을 붙잡고 살다가 희귀병으로 결국 그토록 쪽팔려 가기 싫어 버티던 요양병원에서의 삶을 살고 있게 된 게 과연 우연일까? 바꿀 수 없는 업이자, 숙명일까? 난 둘다 아니라고 본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런 아버지가 내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빛도 그림자도 사랑하라.
마주보라.
"본질"이 무엇인지 아직 나도 다는 모르겠지만, 알아가는 방법은 알게 됐다.
나는 찌질하다. 수치심도 정말 많고,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상처에 벌벌 떨고 눈물도 엄청 많은 사람이다.
정말 그렇다. 나에겐 그런 면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렇게 나의 그림자를 자꾸 드러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이 더이상 어둠과 공포의 영역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저 삶의 어떠한 이유들로 생겨난 감정과 축적된 기억이란 걸 알았고, 잘 놓아보내주게 되었다.
내가 아직 아버지가 바라마지 않던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진 못했지만 아버지가 죽어도 하지 않으려했던 그 수치스런 욕망과 상처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단 느낌은 든다.
그게 지금으로서 내가 찾은 가장 쉽고 단순한 수행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온전한 깨달음"이란 빨리 깨닫고 늦게 깨닫고가 중요한 것도 아니란 걸 이젠 안다.
추구하고 찾아 헤맨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니란 건 진작에 알았다.
삶은 그 자체로 끝없는 수행의 여정이다. 여전히 내겐 하루하루가 그렇다.
쉽지 않다.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에 아픔이 동반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은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릴 때 나타나는 반자동적인 몸과 마음의 반응이다.
그 어둠을 긍정해내는 과정에서 처음 아팠던 것과 같은 아픔이 반복된다.
한번이 아닐수 있다. 아팠던 단 한 번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치유의 과정에서 수도 없이 여러 번 아픔을 반복해서 겪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가면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걸 안다.
피해가면서 깨달음에 이르려던 아버지의 결말을 이미 너무 잘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꼭 사랑하려한다. 그런 아버지를 꼭 온 몸과 마음으로 품으려한다.
난 부모님을 겪고 나니 정말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졌지만, 혹여 앞으로 마음이
바뀐다면 난 꼭 아버지가 내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번 생에 아빠가 가르쳐주신 큰 아픔, 피해의식,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내가 받고 싶던 있는 그대로의 사랑과 인정을 꼭 드리고 싶다.
혹시 저번 생에 내가 정말 못된 부모여서 이번 생에 반대로 와 나에게 액땜한 거였으면 잘했다고
꼭 속 시원~하게 더는 할게 없을 만큼 다 푼 것이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진정한 "본질"로 다가가고자 하는 글에 부모님. 특히나 아버지 얘기가 나와진 걸 보면
그 길에 가장 큰 관문은 여전히 아버지인가 보다.
오늘도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질문하고 쓸데없이 올라오는 잡념들을 알아차려본다.
순간순간 용맹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