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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싱스네일 Mar 30. 2019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어?

때로는 답을 모르더라도



음식을 먹을 때 이상한 버릇이 몇 가지 있다. 프링글스 같은 감자칩 통을 열면 보통 위쪽에는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감자칩이 있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부서진 조각의 감자칩이 섞여 있다. 우선 그것들을 쟁반에 살살 쏟은 후에 온전한 감자칩과 온전하지 않은 감자칩을 분리한다. 그리고 온전한 감자칩은 다시 통 안으로 조심히 집어넣고 부서진 감자칩들을 먼저 주워 먹는데, 온전하지 못한 것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 동그란 감자칩을 하나씩 집어 먹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포도를 먹을 때도 그 의식(?)을 진행하는데, 가지에 잘 달려 있는 포도 알맹이들을 살짝 들어 올려 떨어진 포도알들을 그러모은 후 좋아하는 접시에 담아 먼저 먹어 치우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물론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어서 은근한 피로감이 쌓이곤 한다.


또 다른 강박적 습관은 휴대폰 배터리가 100% 충전되어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인데, 오죽하면 약속 시간에 늦었는데도 숫자가 100이 될 때까지 못 나가기도 한다(약속 시간은 강박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 아이러니). 97%나 98%는 안 된다. 꼭 100%여야 한다. 또 위급 상황이 아니고서는 배터리가 저전력 모드로 전환될 때까지 놔두는 일도 별로 없어서 전화를 하다 “잠깐만, 미안. 나 지금 배터리가 3%라 꺼질 수도 있어!”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친구여, 어째서 보조 배터리의 존재를 잊었나요.


이런 성향은 계획대로 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알다시피 인생에서 대부분의 일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나 인간관계에서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실체 없는 불안에 밤을 지새워야 했다. 타인의 감정과 반응이라는 변수에 아무리 철저히 대비한다한들 계획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어떤 성향이든 그게 연쇄적으로 다른 일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굳이 바꾸려 할 필요는 없다. 강박적 성향 역시 생활에 큰 불편이 없으면서 일종의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면 그냥 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내 경우엔 일이나 관계에 불편함을 일으키는 날이 잦아졌고, 조절을 위한 몇 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평소 하던 강박적 습관들을 반대로 해 보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온전한 부분을 먼저 먹었다. 처음엔 약간 찝찝했지만 온전하지 못한 것을 먼저 처리하지 않고도 온전한 걸 누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중요한 업무 연락을 해야 할 때를 빼고는 휴대폰 배터리가 저전력 모드가 되게 놔두기도 했다. 또 휴대폰 알림을 0.1초 내로 확인하는 버릇도 꽤 피로감을 주는 것 같아서 한동안은 잠금 화면에서도 알림이 보이지 않도록 대부분의 어플 알림을 꺼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예민도를 조절했다. 그러다 보니 배터리가 3%여도 심하게 불안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인지치료(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킴으로써 힘든 감정을 다스리는 것으로, 현재 대부분의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에서 가장 효과적인 비약물적 치료로 인정받고 있다)와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강박 성향이 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피로감을 느껴 계획적인 성향을 역으로 이용해 애초에 일정에 휴식 시간을 끼워 넣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일상생활에서 숨통을 틔우니 다른 일에서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나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시도했던 작은 행동 변화가 실제로 생각과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사실’뿐. 계획에서 하나 틀어진다고 나머지 인생이 다 망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때로는 답을 모르는 채로 그냥 해 봐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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