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6)
비키에게 내려던 레터는 그렇게 잠깐 내 사물함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내 마음을 영 바꾸지는 못했다. 고갈티로 걸어 들어오는 일은 하루하루 더 힘들어지기만 했고, 결국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레터를 들고 비키를 찾아갔다. 하지만 비키는 또 한 번 내 손에 들린 레터를 보았을 때, 이 모든 게 성가셔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말은 이제 프랭크한테 해.”
그리고 그녀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내 레터를 받아 주지도 않았으며, 그저 그만 가보라는 듯 휘휘- 손짓을 해 보였다.
도네가 호들갑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며 라운지로 뛰어 올라온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단, 너 우리를 떠난다며? 정말이야?”
그녀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급하게 나를 붙잡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들고 있던 쟁반을 잠시 내려놓았다.
“세상에, 프랭크가 네 레터를 받아가지고는 혼자만 보고 어디다 넣어둔 거야. 우리한테는 보여주지도 않아서, 아무도 네가 레터를 낸 것조차 몰랐어. 어쩌면 그럴 수 있니?”
프랭크가 그랬다는 건 나 역시도 모르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궁금했지만 도네가 너무 부산스레 굴었기 때문에 그 이유를 되물을 수 없었다. 사실 도네의 부산스러움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똑같은 말을 다섯 번씩 되풀이했고, 이미 한 가지 일을 하고 있는 스태프에게 또 다른 일도 동시에 해내라고 재촉하고는 했다. 때문에 나는 그녀를 조금 더 특별히 못 견뎌했건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나를 못하는 게 없는 웨이트리스 취급을 하곤 했다.
“단, 네가 저쪽에 가서 주문 좀 받으면 안 돼? 저기 저 new girl은 저 테이블까지는 소화를 못해내.”
“너 지금 레프트뱅크로 좀 갈 수 있어? 오늘 레프트뱅크가 너무 바빠서 네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단, 너만 브레이크 타임 못 가진 거 아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니? 지금 여기서 네가 빠지면 감당이 안 될 거야."
"단, 이 음식은 몇 번 테이블로 가야 되지? 그럼 이건? 312번 테이블은 누가 맡고 있는 거야? 네가 가서 상황 좀 보고 올래? 저 손님들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캐티가 영 신경을 못 쓰네."
그랬던 도네니까. 주문이나 서빙이 조금만 꼬인다 싶으면 일단 나를 붙잡고 물어보곤 했던 도네니까. 내가 며칠 전 레터를 냈다는 걸 알게 된 후 나에게로 뛰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사실 다정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녀가, 처음으로 내 팔을 붙들고는 '단, 대체 왜 떠나려는 건데? 넌 고갈티가 싫어?'라고 물어왔기 때문에 나는 조금 난처해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네가 되게 좋은데, 넌 아니야? 우리는 네가 안 떠났으면 좋겠어.'라는 그녀의 말 때문에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고갈티를 그만둘 때까지,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왜 고갈티를 떠나는 거냐고 물어온 사람은 비단 도네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에게 종종 마귀할멈처럼 굴곤 하던 레스토랑의 코니는, 잠깐 디저트를 만들러 올라간 나에게 '너 고갈티 그만둔다며?'라면서 아는 체를 해왔다. '넌 그래도 좀 괜찮았는데 이제 너도 지쳤니?' 어디서 들은 것인지 마틴마저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지, 그렇지 않다면 고갈티를 왜 떠나는 건지 물어왔다.
나의 마지막 날, 안나가 플롯 봉투를 건네주며 써준 메시지. 모두가 나에게 어째서 고갈티를 떠나느냐고 물었지만, 그 속에서 비키만은 침묵을 지켰다.
안나도 프랭크도, 고갈티를 그만둔 후 무슨 다른 계획이 있는 건지 물어오는 그 속에서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킨 건 비키뿐이었다. 그녀는 내 레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내가 며칠까지 일을 하기로 했는지 따로 확인을 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나는, 어쩌면 그녀가 내가 그만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레터를 낸 이후 내가 받아야 했던 스케줄 표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레터를 낸 그다음 주부터, 비키는 내게 평소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스케줄을 안겨주었다. 나는 거의 매일 마감을 했고, 원래는 두세 명이서 함께 해야 하는 마감을 가끔은 혼자서도 했으며, 마지막 9일 동안은 단 하루도 쉬는 날을 받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션은,
“단, 너는 언제나 고갈티에 있는 것 같아. 넌 쉬는 날이 없어?”
라고 물어 왔다. 유난히 나와 사이가 나빴던 엘레노라마저,
“그런데 단, 왜 너만 이렇게 끔찍한 스케줄을 받는 거야?”
라며, 불쌍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며칠 동안, 내가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라리사는 비키가 나를 엿 먹이는 거라며 나 대신 분개하고는 했다. 'Bitch, 네가 그만둔다고 너한테 복수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스케줄을 묵묵히 버텼다. 왜 나는 쉬는 날이 없냐고 묻지 않았고, 왜 나만 혼자서 마감을 해야 하는 거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2주일이 지나갔고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나의 마지막 날도 D-day로 다가왔다.
나는 출근을 하면서부터 '자, 이제 몇 시간만 더 버티면 된다!'라고 생각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한 시간, 한 시간 내 마지막 날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날만은 모두에게 더 친절해지려 애썼고, 모든 스태프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껏 도와주었다. 그리고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고 다시 메인바로 돌아와, 방금 손님에게서 받은 주문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단."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온 것인지 비키가 바 안 쪽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야.”
그러니까 그녀가 일과 관계없이 나에게 말을 건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난 2주간, 나는 그녀와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었다.
"응,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야."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슬쩍 웃어 보인 후 다시 주문서를 작성하려다가, 잠깐 손에서 잡고 있던 펜을 놓았다. 왠지 이 순간이 아니면 비키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비키의 표정이 변한 건 그 순간이었다. 딱히 무심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고 있지도 않던 그녀가 '그동안 고마웠어.'라는 내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그녀가 마치 토라진 여학생 같아 보여서 잠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서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녀가 나에게 토라진 것 같을까.
"단, 가지 마."
"......?"
"날 혼자 남겨 두고 가지 마. 네가 가면, 나는 누구랑 같이 일해?"
조금,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순간이었다. 비키한테 내가, 함께 일하고 싶던 사람이었나. 내가 없어지면, 그녀는 혼자가 되는 건가?
그러니까 지난 2주 동안,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서운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인가.
비키는 그 나이를 알게 되기 전까지 결코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스태프들에게 친절했지만,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프랭크와 도네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마틴에게서 절대로 야단을 맞지 않는 웨이트리스가 누구인지, 심지어는 안나가 선호하는 웨이트리스가 누구인지도 대충 알고 있었지만 비키의 마음에 대해서라면 모두가 어느 정도 자신 없어했다. 그녀는 모두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실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비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지난 2주 동안 그녀가 나를 너무 힘들게 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나도 조금 힘들었으니까.
“비키, 많은 스태프들이 떠날 때, 하필 나도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고갈티를 떠나도 네가 나한테 최고의 매니저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동안 네가 나한테 해준 모든 것에 정말로 감사해."
금요일 저녁의 고갈티는 많은 사람들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정신없이 붐볐다.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거나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나와 비키만이, 잠시 일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알듯 모를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비키가 드디어 웃음을 지었고, 쓰윽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살짝 붙잡는가 싶더니, 곧 그 손을 거두고는 뒤돌아 섰다.
그것이 내가 비키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마감을 했고, 그러니 당연히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비키에게 인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가 마감을 끝내고, 프랭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드디어 고갈티를 나설 때까지도 어쩐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랭크, 비키는 어디에 있어?”
“글쎄.”
“호스텔에 있겠지?”
“음, 내 생각에 그녀는 집에 간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마감을 하는 날에는 절대로 우리보다 먼저 고갈티를 나서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굳이 호스텔(역시 마틴이 운영하고 있던 곳으로, 마감 후에 우리가 사용한 라디오와 마이크, 주문서 등을 갖다 놓던 곳이다.)에 들러 보았지만, 어디서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비키, 마지막에 너한테 인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그러니까 네가 그리울 거란 말하고 싶었어. 오늘 보니까 새로운 스태프들이 많이 왔더라. 너를 위해서라도 그들이 모두 다 일을 잘 해냈으면 좋겠어.]
그러자 곧 비키에서 답문자가 도착했다.
[단, 문자 보내줘서 정말 고마워. 너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야. 너랑 같이 일하는 건 나한테도 큰 즐거움이었어. 넌 언제나 열심히 일했고, 참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 네 여행이 즐겁기를 바라고, 또 네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 단, 고갈티의 우리들을 잊지 마!]
나는 비키의 부탁대로 고갈티의 사람들을 잊지 않았지만, 돌아간 고갈티에는 더 이상 그녀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처럼, 나는 고갈티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45일간의 유럽 여행을 끝내고 고갈티로 돌아갔을 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내가 고갈티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키도 갑작스레 고갈티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제니퍼와 아리안느에게서 전해 들었다.
“매니저는 원래 한 달 전에 그만둔다고 말을 해야 한대. 그런데 비키가 딱 2주만 기한을 주고 그만두는 바람에, 다른 매니저들이 좀 힘들었나 보더라고.”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Don't leave me alone.’이라고 말하던 비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조금 더 그 옆에 있어 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비키만 그곳에 남겨놓고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만 남긴 채 그냥 떠나버렸고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비키를 만나지 못했다.
(+ 아니다. 어쩌면 한 번은 더 그녀를 만났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