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7)
유럽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던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온 건 엘렌이었다.
[헤이, 커피 한 잔 할까?]
그렇게 만난 엘렌은, 내가 없던 석 달 동안 고갈티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비키가 갑자기 고갈티를 떠났고, 도네도 자기 나라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남은 매니저가 프랭크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은 급하게 매니저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자신이 혼자 비키와 도네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알잖아. 그는 늘 자기가 하던 일만 해.”
하긴. 프랭크니까. 비키가 있든 없든, 도네가 떠났든 말든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단, 나는 많이 힘들었지만 어쨌든 고갈티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어.”
그렇지만 엘렌은 고갈티가 예전처럼 힘든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스케줄은 예전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아.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 오후 6시에 퇴근하고, 오후 6시에 출근하면 마감 전에 퇴근을 해. 나는 최대한 모든 스태프들이 하루에 8~9시간 이상은 일하지 않게 신경을 쓰고 있어.”
그리고 말을 멈춘 엘렌이, 잠깐 한숨을 쉬는 것을 보고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를 짐작했다.
“그런데… 좋은 스태프가 너무 부족해. 아이들이 다 너무…….”
그렇게 말을 끊은 엘렌은 '그 아이들'을 생각하자 두통이 오기라도 하는 듯,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고갈티에서 지금 일하고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오래된 웨이트리스가 석 달도 안 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단, 네가 나가던 날 들어왔던 뉴걸들 있지? 그중에 몇이 아직 남아 있는데, 걔네가 가장 오래 일한 애들이야."
대충 상황이 짐작은 갔다. 내가 라리사와 같은 날 고갈티를 떠난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에더가 그만두었고, 또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제니와 아리안느도 고갈티를 떠났다. 고갈티를 그만둔 지 이제 석 달 밖에 되지 않았건만, 프랭크와 안나, 엘렌과 앤디를 제외하곤, 내가 알던 사람들 중 고갈티에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은 스태프들만 가득한 상황에서 10월 말, 핼러윈이 다가오고 있었고, 핼러윈에 지나고 나면 연말, 그러니까 그야말로 대목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었다. 엘렌은 이 아이들만 데리고 그 대목을 맞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단, 네가 고갈티로 돌아와 주면 안 돼?”
그녀가 나를 찾은 건 바로 그 이유였다.
새벽 네 시, 마감을 하고 나면 가끔 엘렌과 이곳으로 커피를 마시러 오곤 했다. 오후 8시만 되면 모든 카페가 문을 닫아버리는 더블린에서, 드물게도 24시간 문이 열려 있던 이 카페가 때로는 우리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엘렌은 하얀 얼굴에, 눈 밑에 촘촘히 주근깨가 박힌, 새빨간 머리를 짧게 친, 스스로를 농담처럼 '진저(Ginger)*'라고 부르던, 아일랜드 아가씨였다. 나이는 고작 스물한두 살밖에 안 되었지만 고갈티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큰 펍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데다 아이리쉬였기 때문에 그녀는 처음부터 마틴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그녀가 곧 매니저 수업을 받게 될 거란 건, 고갈티를 그만두기 직전 그녀에게서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단! 단! 나 마틴에게서 이것들을 받았어. 마틴이 이제 곧 나를 매니저로 올려주겠대!”
사실 웨이트리스들 중에, 엘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웨이트리스들을 가장 함부로 대하는 바텐더였다. 쉽게 화를 냈고, 쉽게 소리를 질렀고, 그녀 스스로도 침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손님이 갑자기 몰려들면 실수가 잦아졌다. 그런데 그 실수의 탓을 종종 웨이트리스들에게로 돌리곤 했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엘렌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엘렌과 꽤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그날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게 되면 늘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띠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일하는 동안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일하는 걸 좋아한 것뿐이었다.
나 역시 딱히 그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단, 우리 브레이크 때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라거나 ‘끝나고 커피 한 잔 할래?’라고 물어오면 별로 그녀를 거절하는 법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고갈티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도, 나는 그녀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엘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미 긴 여행을 하고 오느라 돈을 쓸 만큼 써버린 터였다. 당연히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는데,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비자의 만료 기간이 넉 달 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비자를 또 한 번 연장할지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직 정하지 않은 채였고, 그러니까 넉 달 반밖에 남지 않은 비자를 가지고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미 나를 잘 알고 있는 고갈티로 돌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엘렌의 말대로 고갈티의 스케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새로 들어간 고갈티에서 나는 한 주에 40시간 이상은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예전처럼 메인바의 고정 스태프가 되지 않고 레프트뱅크의 붙박이가 되었다. 일 자체는 조금 더 힘들었지만, 술을 마시는 손님의 수가 현저히 적은 레프트뱅크를 나는 메인바나 라운지보다 훨씬 더 선호했다.
그렇게 메인바를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안나와 함께 짝을 이루어 일하는 날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가 한동안 메인바의 오후 시간 붙박이로 일했던 것은, 안나의 의견이 스케줄 표에 반영된 것이라던 미승의 말을 감안하면, 나는 더 이상 ‘안나의 페이버릿 웨이트리스’가 아닌 모양이었다.
스케줄은 나아져 있었지만, 그래도 고갈티는 여전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일을 잘하는 아이들끼리 뭉쳤고, 실수가 많은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걸 싫어했으며, 함께 돌봐야 할 일들을 다 무시하고 자기 테이블에만 신경 쓰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서슴없이 ‘bitch’라고 불렀다.
나는 별로 친절하거나 다정하진 않았지만,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이들과는 쉽게 가까워졌다. 그곳에서 가장 일을 잘하던 모니끄와 스테파니는, 에더와 라리가 그랬던 것처럼, 금세 나와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쟈넷은 내가 작은 도움만 건네도 ‘Dan, you saved my day!’라며 늘 분에 넘치는 고마움을 표하곤 했다. 나와 툭하면 부딪히곤 하던 이벳은 ‘You are too bossy.’라고 말하며 입술을 비죽이다가도, 자기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단 내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고갈티에서 일을 한 지 서너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는 했다.
“You are such a disaster.”
어느새, 프랭크의 말버릇을 배운 나.
“알아, 알아. 단. 하지만 일단 이것부터 좀 도와줄래?”
그래 봤자 결국 나를 이기고 마는 이벳.
그곳에서 또 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던 고갈티. 돌아온 고갈티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앤디는 돌아온 나를 살짝 안아 주었지만, 프랭크는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 놓고선 내가 돌아온 첫날부터 다시 라디오를 통해 나를 불러대기 시작했고, (Dan, where are you? Could you come to me? Dan, do you hear me?) 그리고 또 여전히, 절대 나를 퇴근시켜주지 않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마틴도 여전했고, 엘렌도 여전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똑같은 고갈티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비키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가 칵테일을 만들고 있을 때면, 나는 가끔 그 앞으로 가 그녀의 마법 같은 솜씨를 구경하고는 했다. 비키, 이거 어느 테이블로 가져갈까? 그러면 나를 슬쩍 쳐다본 비키가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웃어 보였다. 메인바로 좀 가져가야 하는데, 잠깐만, 이것까지 올려줘야 돼. 그러면 그녀가 굳이 다른 웨이트리스를 부르지 않아도 되게끔, 나는 그 앞에서 그녀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며 서 있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키가 없어서, 나는 더 이상 칵테일 만드는 모습 같은 걸 구경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아무리 지쳐 있어도, 내가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어디선가 슬쩍 나타나,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마감 청소로부터 빼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이 때로는 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엘렌은 나에게 잘해주려고 애썼고, 마틴도 프랭크도 나에게 화를 내는 법이 없었지만. 돌아간 고갈티에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일주일에 60시간씩 일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는 또 그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마음이 허전했다. 그러니까, 무언가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 영미권에서는 빨강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백인을 흔히 '진저'라고 부른다. 흔히 '빨강머리'와 '초록색 눈'을 아일랜드인의 특징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일랜드 인의 가장 흔한 머리 색깔은 빨간색이 아니라 갈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