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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Epilogue. 기억을 기록한다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Epilogue)



그 때, 그 시끌벅적하던 메인바에 서서 비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후 그녀를 딱 한 번 더 본 적이 있었다.  


2년 1개월 간의 더블린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나는, 그로부터 1년 2개월 후 다시 더블린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초여름의 오후였을 것이다. 그 날은 모의 시험을 친 날이었고, 생각보다 어려웠던 시험 때문에 좌절을 한 날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나는, 당시 나의 베스트 프렌드 노릇을 하고 있던 (그때 그 고갈티의 쟈넷이 아닌 또 다른) 쟈넷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쟈넷이 간밤에 우주와 나누었다는 대화 내용을 듣고 있는데, 문득 유리창 너머로 눈에 익은, 주황색 머리의, 날씬한 아가씨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키?


오랜만이었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쨍한 햇볕 아래, 더 쨍한 오렌지색 머리가 한 묶음으로 꽉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찰랑, 찰랑거리며 거리를 미끄러져 내려가기라도 하듯 잰 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녀는 분명히 비키였다.  


비키!


나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비키는 주위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고, 그러다 신호등이 바뀌는 걸 본 듯했고, 그러자 살짝 걸음을 재촉해 횡단보도를 뛰듯이 건너갔다.



다시 돌아간 더블린에서, 나는 비키를 딱 한 번 본 일이 있었다.

 



순간,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하나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쉬이 자리에서 일어서지지 않았다. 그 사이 2년쯤 시간이 지나 있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신, 비키가 생생한 모습으로 내 꿈에 나온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곧 결혼을 한다고 알려주었고, 결혼 선물로 한국의 기념품같은 걸 고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무언가 함께 선물을 골랐지만, 어떤 선물을 선택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 꿈에서 깼다. 뜬금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에게서 청혼을 받았다는 건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의 SNS를 보고 알았다.


결혼을 하는구나- 생각을 했고, 하지만 축하한다는 메시지같은 건 보내지 않았고, 그리고 그 후로는 그녀를 잊고 지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비키는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횡단보도를 건넌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더니 곧 그 오렌지색 머리카락의 흔적만 남겨놓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쟈넷은 여전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어느 순간부터 놓치고 있었다.   


"단!"


그런 나를 알아챈 쟈넷이, 곧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미안해. 아는 사람이 지나가서."

"누구?"

"응?"

"아는 사람이 지나갔다며? 누가 지나갔냐고."


그제야 나는, 나에게 비키를 지칭할 만한 적당한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사? 동료? 친구? 지인? 하지만 왠지 어떤 단어도 그녀에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이라는 말로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면, 문득 그 시끄럽고 번잡하던 커다란 펍 안에서, 슬쩍 어디선가 나타나 내 손목을 붙잡곤 하던 그녀가 생각났다. '단?'


'오늘 일찍 집에 가고 싶어, 아니면 더 일하고 싶어?'

'나? 집에 가고 싶지!'

'그럼 오늘은 이만 바이바이.'


'단, 오늘도 집에 가고 싶어?'

'응! 나 가도 돼?'

'넌 맨날 집에 가고 싶다고 그런다? 집에서 뭐 애인이 기다리기라도 해?'

'비키, Home, sweet home, 몰라? 내가 내는 방세가 얼만데 가끔은 그 sweet한 곳에 좀 쉬어줘야지.'


나는 왜 비키가 나에게, 다정하게 군 적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주었던 그 따뜻함들이 다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그녀에게 메시지 정도는 보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런저런 SNS에서 친구로 맺어져 있고, 그러니까 서로의 소식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녀가 올리는 사진에 '좋아요' 정도만 누를 뿐 메시지를 보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단'이라고 불리던 그 웨이트리스가 아직도 자신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알지 못하겠지. 그래서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글로 쓰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애틋한 기억들이 꼭 현재로 되살아나야 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과거의 애틋함은 그냥 애틋함대로 남겨두고, 나는 또 다른 시간을 향해서 걸어가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비키를 쫓아 나가는 대신, 그냥 그녀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그것이 어쩌면 그녀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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