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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그녀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5)


결국 난, 고갈티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미리 써둔 Letter*를 내기 위해 따로 비키를 찾아갔을 때, 하지만 그녀는 ‘No, Dan. No.’라고 말할 뿐이었다.   


“단,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말해.”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훌쩍 사라져 버리는 그녀 때문에, 나는 결국 그 레터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 




고갈티에서는 최소 퇴사 2주 전, 정확한 퇴사 날짜와 함께 매니저나 마틴에게 간단한 레터를 써서 내야 했다. 



우리가 '비키'라고 부르던, 리투아니아에서 온,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쯤 된 빅토리아. 그녀는 모두가 모두에게 무례해지던 그 공간에서도 우리들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던 유일한 매니저였다. 때문에 그녀가 모든 매니저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음에도 나는 오로지 그녀 앞에서만 공손해지곤 했다. 


비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를 두고, 라리사는 가끔 


“너 그거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같은 거야.”


라고 말을 하곤 했다. 


“물론 도네나 프랭크에 비하면, 비키가 훨씬 좋은 사람이긴 하지. 하지만 사실 너한테 그렇게 끔찍한 스케줄을 주는 건 다름 아닌 비키잖아. 결국 비키도 네가 자기한테 불평을 안 하니까 그렇게 긴 근무표를 주는 거고, 자기가 싫어하는 스태프랑은 일하기 싫으니까 자기가 일하는 날에는 널 절대 집에 안 보내주고 그러는 거야. 그런 점에서 결국 비키도 프랭크랑 똑같은 거 아니야?”


늘 그렇듯,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하는 라리사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비키는 모든 스태프의 스케줄을 총괄하는 매니저였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주 5일과 주 6일 스케줄을 번갈아가며 받는 사이, 내가 계속해서 주 6일 스케줄만 받은 것은 결국 비키의 결정 때문이었다. 내가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에 오픈부터 마감까지 일을 해야 했던 것도 그녀가 나에게 그런 스케줄 표를 안겨준 탓이었다. 


하지만. 물론 나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비키가 조금도 싫어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녀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기침감기는 꼭 한 달을 갔다. 기침은 점점 심해지더니 고질적인 증상으로 자리 잡았고, 밤이면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일을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집에 좀 일찍 보내주면 안 되냐고 물어본 어떤 웨이트리스에게 ‘그렇다면 앞으로도 쭉 쉬어.’라며 해고 통지를 해 버린 것이 고갈티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금요일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아, 오늘은 정말 죽어도 마감까지 일할 수 없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출근을 한다면 마감까지 일하게 될 거란 사실이 너무나 명백해서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결국 침대 위에 앉은 채로, 한참을 고민을 하던 나는 용기를 내 비키에게 문자를 보냈다. 


[비키, 혹시 괜찮다면 나 오늘 하루만 쉴 수 없을까? 나 벌써 몇 주째 기침감기에 시달리고 있는데, 오늘은 정말 몸이 너무 좋지 않아.]


그렇게 문자를 보내면서, 나는 그녀가 ‘좋아. 그럼 계속해서 집에서 쉬도록 해.'라고 답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고갈티의 사고뭉치였고, 그러니 있어도 없어도 별 차이가 없는 웨이트리스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비키가 나에게 보내온 문자에는


[헤이, 너 오늘 몇 시 출근이야?]


라고 적혀 있었다. 


[웬만하면 너 쉬게 해주고 싶은데, 네가 너무 늦게 연락을 해서 지금은 대신 일해 줄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 대신 오늘 딱 세 시간만 일 할래? 6시에는 어떻게든 집에 보내줄게.]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문자에, 'Thanks, Vicky'라는 말 뒤에 느낌표를 세 개쯤 찍어서 보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어떤 스태프도 일찍 퇴근할 수 없다는 사장 마틴의 괴팍한 규칙을 깨고 6시 정각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일을 하고 있던 나에게, 비키가 뜬금없이 'It's for you'라며 건네준 위스키 잔. 나는 아직도 그녀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로부터 두어 달쯤 시간이 더 지나, 내가 어느덧 고갈티에서 가장 긴 근무표를 받으며 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키가


“Dan, How are you?”


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날만 해도 꽤나 여러 번 마주쳤는데 갑자기 웬 인사인가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냥 습관처럼 'Good.'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건만, 비키는 


“정말이야?”


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응? 나 안 괜찮아 보여?”

"응. 너 엄청 피곤해 보여.”


물론 당시의 내가, 피곤하지 않을 방법이란 전혀 없었다. 그때의 나는 잠을 자는 것과 고갈티에서 일을 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으니 말이다. 


“피곤해 보이는 게 아니고, 난 정말 피곤해. 그래서 말인데, 비키…”


그러자 흘끗 나를 쳐다보는 비키. 


“나 이번 주에 two days off 주면 안 돼?”


그러자 그녀는 살짝 나를 노려보았고, 곧 ‘안 돼’라고 대답했지만. 그리고 나도 그런 그녀를 향해 그냥 베실- 웃어 보이고 돌아섰지만. 며칠 후 새로 나온 로스터에는 내 이름 옆에 월요일과 화요일 칸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뜬금없는 이틀의 쉬는 날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혼자서 베실- 웃었다. 그러니까 비키가 '안 돼'라고 말하던 순간에도 나는 그녀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거란 걸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키는 결코 나를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다정했다. 새벽 2시 30분, bar 문을 닫고 나면 한 시간 반 동안 매일매일 우리는 뒷정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종종 새벽 2시쯤 어디선가 나타나 내 손목을 슬쩍 붙잡고는 


“단, 바이 바이.”


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곤 했다. 


"응?"

"집에 가도 된다고."

"정말?"

"그래. 붙잡기 전에 어서 가."


그러면 Huray!!!라고 외치며, 스태프 룸으로 뛰어 내려가던 날들. 


그렇게 마감 직전, 집에 간다는 것은 대청소로부터 제외된다는 것이고 시급도 계산되지 않는 새벽 3시부터 4시 사이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나와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면서도, 제니퍼나 라리사가 가끔 나를 비아냥거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비키는 늘 단한테만 ‘너 집에 가고 싶어? 아니면 더 일하고 싶어?’라고 물어보는 거 알아? 왜 늘 너한테만 선택권을 주는 거야?” 

“사실  우리 중에선 단 네 스케줄이 제일 좋잖아. 네가 일을 오래 하는 건 사실이지만, 대신 주중 낮 타임은 네가 거의 독차지해. 그 시간에 일해야 팁을 진짜 많이 받을 수 있는데.”

“게다가 제일 힘든 건 토요일 마감인데, 나는 단이 토요일 마감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토요일 마감은 맨날 나만 시킨다니까.”

“그리고 이건 진짜 묻고 싶은 말인데, 마감 직전에 툭하면 너를 집에 보내주는 이유가 뭐야? 어쨌든 제일 힘든 일에서만 단을 빼준다니까.”


한 번 시작되면 쉽게 끝나지 않던 제니와 라리의 불만들. 


사실 그때의 우리는 너무나 힘들게 일을 해서, 각자가 받는 사소한 차별에도 예민해지곤 했다. 나 역시 내 스케줄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 비아냥들을 그냥 말없이 들어낸 건, 아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키가 아무리 다른 아이들과 나를 똑같이 대해도, 나는 그녀가 나에게 '아주 조금은 더' 따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비키를 좋아한 건 그런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처음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하던 때의 내가,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모르는 술 이름도 너무 많아서 툭하면 실수를 저지르던 내가,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갈 때마다 나를 대하던 그녀의 태도 때문에 나는 비키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직 신입이던 내가 다른 웨이트리스가 맡고 있는 테이블의 음식을 계속해서 대신 서빙해주는 걸 보았을 때, 그런데도 다른 웨이트리스들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걸 보았을 때, 그녀는 슬쩍 내 손목을 붙잡더니 'Thanks, Dan'이라고 말했었다. '괜찮아, 네 수고는 내가 알고 있어.'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내가 몇 개의 접시를 동시에 들고 레프트 뱅크로 넘어가다가 발을 접질려 넘어졌을 때, 그래서 서빙하던 음식을 다 쏟고 접시들도 다 깨뜨려 버렸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옆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이도 다름 아닌 비키였다. 그녀는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그릇들을 쓸어 담았고, 나에게 발목이 괜찮은지 물었고, 괜찮다고 답하는 나에게 말했었다. 앞으로는 이 계단 조심해.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넘어져. 이거 내가 치울 테니까, 넌 다친 데 없는지 보고 와. 


냉정한 듯 보여도,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마음껏 친절해지던 사람.  




그러니까 비키가 아무리 나에게 끔찍한 스케줄을 주어도 나는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 때문에라도 나는 고갈티를 그만두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했다.





*)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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