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이로비댁에 하루

복된 기회

by Bora

지난 5월 중순에 방학한 한글학교는 거의 세 달간 휴강이었다. 나 또한 6주간 안식월을 다른 나라에서 보내고 왔던 터라 현지 교회 선교관을 빌려서 사용하는 사무실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들렸다. 다음 주 토요일에 있을 한글학교 개강을 준비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교회 사무실에 가서 2학기 장소 사용료를 지불하고 나니 까르프 슈퍼마켓에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사무실로 물건을 옮기느라 애쓰는 젊은 청년에게 미안함이 컸다.

물건이 담긴 튼튼한 사각 모양의 봉지 입구에 굵고 튼튼한 스탬프가 꼼꼼히 박혀있었다. 전에 이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다친 바람에 조심스럽게 일일이 날카로운 스탬프를 제거하면서 봉지 안에 담긴 과자와 음료수, 물티슈 그리고 여러 가지 물건을 확인한다.

일을 마친 케냐 청년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음료수와 비스킷을 건넨다. 마음속으론 캐시로 팁을 주고 싶었으나 요즘 케냐는 현금보다는 Mpesa라는 앱으로 돈을 지불하는 일이 많다 보니 잔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가 배달해 준 봉지 22개를 정리하느라 날씨가 오싹할 정도로 추운데도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오랫동안 비웠던 사무실은 창문 틈으로 들어온 매연과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모든 창문을 열어젖히고 사무실 구석구석을 닦아내니 물티슈가 연탄보다 더 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L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기증하고 간 몇 박스의 책을 꽂으며 그의 아들이 생각났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J가 카이스트 대학으로 입학 결정이 났다고 한다. 내가 18년 케냐살이 동안에 J는 한인자녀들 중에서 두 번째로 그 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J의 가는 길을 응원하며 그의 손때 묻은 책을 정리한다.

내친김에 바닥청소를 하는데 학교 가까에서 사는 Y가 방문했다. 우리는 김밥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어제저녁에 새우튀김을 하다 말고 남편에게 큰소리로 화를 냈다는 걸, 그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사람 사이 참 힘들다.

집에서 출력해 온 회의자료를 부지런히 복사하고 서류를 분류해서 9개의 파일을 만들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어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간다에서 중국사람들이 재배한 쌀 (맛은 한국쌀과 비슷하다)지인 댁에서 픽업하고 나니 부자가 된 느낌이다. 아니, 마음만큼은 늘 부자다.

나이로비 외곽에 위치한 집에 도착하니 남편과 함께 나를 반갑게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2주간 우리 집에 스테이를 한다는 부부. 쌀을 사 오길 참말로 잘했다.

신은 안식년 5주 동안에 미국 선배네로부터 넘치도록 받은 사랑과 섬김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복된 기회를 주셨다. 그렇지, 공짜는 없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녹록지 않은 살림에도 감사함으로 섬기려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나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한인 벼룩시장에 올린 한글학교 개강 안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