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년 12월 8일

행복한 꿈쟁이

by Bora

한차례 세찬 비가 내리더니 밤새 황금빛 낙엽들이 보도블록 위 수북이 쌓였다. 나뭇가지 끝에 간당간당 붙어있던 은행잎 하나가 바르르 떨며 운동화 위로 내려앉는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미화원들이 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낙엽들을 쓸어 담았다.

어제 아침에 보라는 S출판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녀가 글을 올리는 브런치에서 소설을 읽었다는 K라고 소개하는 편집장은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 소식인가. 오래전부터 개인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자는 권유와 제안을 받아왔지만 나름 이름이 있는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보라가 글쓰기를 시작한 지는 20년쯤 되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글을 썼고 울컥한 감정이 올라와서 글을 쓰고 눈물이 찔금 날만큼 행복해서 글을 쓰기도 했으며 하늘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 나올 때조차도 글을 꾸준히 써왔다. 글의 주제와 방식은 제 멋대로 식이었다. 어느 때는 A4 1장이나 2장 정도의 글을 말하듯이 앉은자리에서 써 내려가기도 했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마음의 소리를 긁적거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힘든 것은 편집이 배로 어려웠다.

보라가 글을 숙제하듯 쓰게 된 것은 팬데믹 코로나 시작 전인 2019년 9월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쯤 배가 고픈 듯 책을 읽고 그 배부름을 비우기 위해서 글을 써내려 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인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찾아들었고 밥을 먹다가도 글의 소재가 번뜩 떠오르면 핸드폰이든 종이든 적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작은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순하고 반복되는 아프리카의 삶을 이겨내지 못할 것 만 같았다. 보라와 늘 함께 있는 남편조차도 눈에 띄게 변한 그녀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종종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글 쓰는 게 돈이 되냐고 묻기도 했으나 뭐라고 설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날은 밤이 깊어가고 날이 밝아오는 아침까지 글을 쓸 정도로 모든 에너지가 머리와 심장 그리고 손끝으로 흘러넘쳤다. 그녀는 몇 해를 글을 쓰고 또 썼다.


보라가 사는 곳은 아프리카 케냐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국의 공모전에 글을 응모했었으나 그 일은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어느 곳은 반드시 A4 용지에 출력을 해서 우편으로 발송을 해야 만 했다. 어느 해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한국에 사는 후배에게 이메일로 글을 보내어 우편 발송을 부탁했다. 어느 곳은 공모전 사이트에 한국의 전화번호를 반드시 기재를 해야지만 접수가 되었다. 다행히도 이메일로 글을 접수받는 곳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수상을 하면 한국의 전화 번화로 통보를 한 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선포하던 2020년 2월 그리고 두 해가 지나 오미크론으로 접어들 때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2022년 흑 호랑이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필 공모전에 몇 차례 응모를 했었다. 그러나 연달아 낭패를 보자 힘이 쏙 빠져 글쓰기를 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인터넷 글쓰기 브런치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도전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보라는 케냐에서 30대 후반과 40대와 50대를 보냈고 60대 초반에 아프리카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에서는 프랑스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아마도 그녀는 프랑스에서 유학 중에 보고 듣고 경험했던 내용들을 소설에 녹아 냈을 것이다. 자신이 살던 둥지를 떠나 타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새로운 나라에서 문화적인 충격과 언어와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라 또한 그런 일을 몸소 경험했기에 그녀의 글엔 케냐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카페 문이 열리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입구엔 브라운색 프렌치 고트를 입은 멋스러운 여자분이 들어섰다. 여자는 카페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보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K의 입술에는 진한 장미색 립스틱이 발라져 있었다.

12월 초, 날씨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 가을의 막바지였다.

보라는 단편 소설 20편을 S편집장 앞으로 꺼내 놓았다. K는 알고 있을까? 이 소설에 묻어 있는 보라의 눈물과 고뇌와 사랑과 애씀을... 글은 단지 글자가 아닌 한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말이다.

보라는 K가 내민 계약서에 당당하게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오늘은 2035년 12월 8일이다.

카페의 창 너머로 하얀 첫눈이 살랑살랑 나무 가지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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