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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Feb 24. 2023

글이 된 퍼즐

새로운 방식으로 A4 1장을 채우다

  보라는 시내를 나갈 때면 택시를 즐겨 탄다. 케냐에는 나름 안전한 우버 택시와 볼트 택시가 있는데 외출하는 당일둘 중 가격이 저렴한 차를 부르곤 한다. 그녀가 외출하는 날에는 택시 뒷줄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집으로 복귀할 때는 혹여라도 택시기사가 그녀가 원하지 않는 길로 들어설까 싶어서 신경이 곤두선다. 보라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으로 미팅 장소에 10분쯤 일찍 도착한다. 그러나 오늘은 택시가 집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12분이나 지각했다. 그녀가 도착한 야외카페의 테이블 위로 아침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카페 주위의 공사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조차 역동적으로 들리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보라는 부드러운 카푸치노 더불을 주문하고는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볼펜을 단단히 쥐고는 무작정 떠오르는 단어를 적어본다. 단어개수를 세어보니 20개쯤이나 된다. 택시, 미팅, 생일, 개고생, 남편, 잠자리, 음식, 공부, 소음, 돌봄, 커피, 외식, 카톡, 라면, 글쓰기, 뱃살, DNA, 아이들, 동백꽃, 브런치다. 다시 그 옆으로 두줄 선을 긋고는 단어들을 적다 보니 제법 감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지난주에는 케냐에서 마지막 생일 맞이아들과 함께 하루레스토랑 다. 아들은 양이 많은 시즐링 소고기볶음을 주문했다.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아들이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하루레스토랑에서 가족과 함께 외식 하던 소소한 행복을 기억하길 바라본다. 서비스로 일본식 계란찜과 볼케이노 치킨볼이 나왔다. 하루 일본 말로 봄이라는 뜻이다. 한국말로 하루는 24시간의 하루.

  보라의 아들은 케냐에 30개월 때 왔다. 그 아이가 어느새 18살이 되었다. 5월이면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로든 가서 대학생활을 할 것이다. 아들이 23학번 될지, 24학번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요즘 들어서 보라의 아들은 고민이 많은지 말수가 다. 아이는 부모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찾아가는 것이 좋기도 하겠으나 마음이 편해 보이지 만은 않 보인다. 보라의 아들이 밥 한 공기를 더 비우며 미소국은 차를 마시듯 들이킨다. 케냐에서 유아기와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이지만 입맛은 토종 한국식이다. 그것도 아빠의 입맛이 아닌 보라의 DNA를 닮았다. 보라의 입맛은 아버지를 닮았다. 달콤한 맛보다는 짭조름한 맛을 더 좋아하고  내장, 선지, 알탕, 순대 종류를 선호한다. 그녀는 나이로비 식당에서 찾아보기 드문 내장 종류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한국의 계절을 기억한다. 지금쯤 한국의 남쪽 지역에는 동백꽃이 나무 가득 피었을 것이다. 눈발이 세차게 불던 날, 꿋꿋하게 붉은 꽃망울을 피우던 동백의 자태를 제주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친구들이 테이블 주위로 둘러앉았다. 드디어 본격적인 미팅시간이 시작되었다. 한 친구가 브런치주문하면서 커피빈과 크로와상을 곁들인다. 커피 마니아인 보라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더 시켰다. 커넥트 커피숍 야외 테이블에서 나름 분위기를 잡은 멤버들은 진지한 대화 오갔다. 한 친구는 며칠 전에 7년 동안 NGO에서 죽어라고 일했지만 행정 일이 너무 많아서 개고생 이라며 안식년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며 카톡보내왔었다. 한 친구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명상이 끝나면 짧은 글을 인터넷 글쓰기라는 브런치 올린다고 한다.

  한 친구가 민트차를 한 모금 마시며 쑥스러운 말을 꺼냈다.

  “부부생활을 유지해 가는 게 참 어렵지만 잠자리가 때론 관계를 회복시키고 눌린 감정을 무장해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미운 남편 랑스럽게 보이더라고요.

  친구의 남편은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다. 살짝 부러운 생각이 들면서 아직 철이 안 들은 남편이 떠올랐다. 

  '자기밖에 모르는 밉상. 어쩔 남편.'

  크로와상안에 들어있는 작은 계란조각을 주섬주섬 커피잔 위로 주어 담던 한 친구가 말을 잇는다.

  “요즘 밥을 적게 먹어도 배가 부른데 자꾸 입에서는 뭐가 당겨요. 특히 하고 라면 별식인데 주식처럼 먹어요. PMS오는  같기도 하고."

"PMS?"

  멤버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주목했다.

"생리전조현상이래요. 그동안 안 아프던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돼요. 가장 큰 고민은 뱃살 때문에 바지 입기가 진짜 불편해요. 이 비계를 어쩜 좋아요."

  그녀는 자신의 뱃살을 농구공을 튕기듯 탕탕 내려쳤다.

  보라가 생각하기에 친구는 PMS가 아니라  갱년기 전조증상이다. 밥양을 줄이는 수밖에.

  글모임의 멤버들은 단어 20개와 거기에서 파생된 어들을 종이에 퍼즐처럼 적어놓고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옆테이블에 멋진 몸매에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한 무리의 남성들이 앉았다. 우리를 쳐다보는 한 남자의 눈빛에서 `팔자 좋은 여자들'이라는 마음이 읽혔다. 어찌 이 진중한 대화를 수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고차원적인 토론이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아슬아슬하게 카페에 도착한 친구가 슬며시 앉으며 말을 꺼낸다.

  “정말 미안해요. 3박 4일 동안 우리 집에 RVA 아이들 방금 기숙사로 돌아갔어요. 한 아이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 케냐 한글학교에서 책을 빌려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 아이 애교가 장난 아닌 것 있죠."

  그녀는 아이가 선물로 주고 갔다는 가나 다크 초콜릿을 테이블 위로 꺼내 놓았다. 메이드 인 진짜 가나 초콜릿이다. 본인 아이가 셋이나 되는 친구가 참으로 대견하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솟구치는지 모르겠다.

  오후의 뜨거운 해가 아파트 공사현장으로 쏟아진다. '뚝딱뚝딱, 칙칙칙'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옆테이블의 남자들은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친구의 눈에서는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진다. 아, 모두 다 사랑하리.


  * 떠오르는 20개의 단어와 원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엮어서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꽤나 재미있게 단어의 퍼즐을 마추어가며 글을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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