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bari Feb 27. 2024

돈이 뭐길래

종이 조각과 숭고한 사랑

  아주 오래전부터 생활비 장부를 쓰고 있다. 아마도 케냐에 왔을 때부터 시작했으니 17년쯤은 된 것 같다. 장부에 적어 내려간 비용은 차량수리비가 아니면 매달 지출 내역과 금액은 비슷하다. 그 장부 끝에는 2만 실링(한화 200,000원)이라는 케냐 지폐가 종이봉투에서 잠들어 있다.

  케냐의 화폐 중에서 가장 큰돈은 1,000실링(한화 10,000원)이다. 몇 해 전에 1,000실링짜리의 가짜 지폐가 시장에 유통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현실이 되었고 케냐 정부는 1,000실링짜리 지폐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구지폐는 은행에서 새로 발행한 지폐로 바꾸어 주었다. 그때 바꾸지 못했던 코끼리가 그려진 지폐를 지금껏 생활비 장부에 얌전히 꽂아 둔 것이다. 낡은 구지폐를 볼 때면 마음 한쪽이 씁쓸하기 짝이 없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2007년 6월, 케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치안이 좋지 않다 보니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한 가지 조언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혹시라도 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얼굴은 쳐다보지도 말고 현찰로 1만 실링을 순수히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비상금을 준비해서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넣어놓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비상금은 말 그대로 비상금이었다. 생활비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침대 밑에서 언제든지 돈을 꺼내 썼다가 다시 넣어두는 식이었다. 오랫동안 해오던 습관은 이사를 갈 때면  비상금이 침대 밑으로 관행처럼 들어갔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케냐에서 10년 이상을 살게 되니 마음은 점점 느슨해져 갔다. 침대 밑에 깊숙이 보관하던 돈은 옷장 속으로 옮겨지면서 부적 같았던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옷장을 정리하던 어느 해, 내가 아닌 남편의 눈에 2만 실링이라는 돈이 발견되었다. 나는 공짜 돈이 생겼다는 기쁨이 큰 나머지 봉투 안을 확인하지 않고 가방 속으로 넣어버렸다.


  긴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우리 집에 선교사자녀학교 RVA에서 14명의 학생들이 온 적이 있다. 중고학생들이 3박 4일을 지내다가 학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나는 중국레스토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어깨를 쭉 펴고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시켰다. 공짜로 생긴 돈이 가방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다 먹지 못한 것은 따로 포장해 갈 정도로 학생들의 양손이 무거웠다. 나는 마지막에 계산서를 눈으로 훑고는 마침내 돈을 꺼내 들었다. 케냐 실링을 받아 든 직원의 눈동자가 순간, 멈칫했다. 그가 머쓱하게 말을 꺼냈다.  

  “마담, 이 돈은 케냐에서 사용할 수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천 실링짜리 20장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종이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부적 같았던 비상금 2만 실링은 여전히 나의 생활비 장부에 깊이 잠들어 있다.


  나의 물주는 친정엄마다. 나이가 84세이신 엄마는 젊어서는 벼와 밭농사 그리고 과수원을 하시면서 세 명의 자식을 키우고 꽤나 큰 집을 구입하셨다. 시간은 지나 과수원이 있던 자리엔 대학이 지어졌고 논이 있던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고된 육체의 노동은 끝났지만 동네 인근에 있는 공장에서 알타리를 다듬으면서 손을 쉬지 않으셨다. 때론 일당을 받으신 돈을 모아서 하나밖에 없는 딸의 용돈을 챙기시거나 결혼을 한 후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사위의 학비를 보태주시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 끝나고 난 후엔 적금을 깨서 다섯 식구의 한국행 비행기 값을 보내주셨다. 그뿐 아니라 녹록지 않은 케냐살이를 하는 우리 가정의 형편을 잘 아시고 어떻게든지 도움을 주시려고 한다.

  엄마가 챙겨주시는 돈은 단지 돈이 아닌 자식을 향한 사랑, 그 이상의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 친히 엄마가 되신듯한 착각이 들정도다. 이렇듯 나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기적을 엄마를 통해서 수시로 경험한다. 이 숭고한 사랑은 결코 당연함이 아니기에 나의 자식들에겐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나는 소망한다. 나의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자녀들에게 사랑의 숭고함을 보여 주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