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

by HONG

한국에서 뇌종양 특히 뇌하수체 선종 관련 치료로 손에 꼽히는 의사 선생님과의 예약이 어렵게 성공했다.

친구들이 부단히 알아봐 준 덕분이었다.

뇌종양 환우 카페 같은 곳에 가입해서 본격적으로 정보도 알아보고 고민한 결과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진료가 가능한 선생님을 예약했던 것 같다.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아버지에게도 모든 사실을 털어놔야만 했다.


다시 MRI를 찍고, 당과부하검사를 다시 하고, 수없이 많은 채혈채혈채혈...

의사 선생님은 지난 3년 내내 다닌 병원에 대해 말을 아끼시려고 하셨지만 탄식을 반복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처방을 하고..."

MRI사진을 보면서 선생님이 말을 정리하시려는 것을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기분이 되는 것 같았다.


"뇌하수체 종양이 약으로 해결이 되는 경우도 있긴 있어요,

나이가 많이 드시거나 또는 수술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으로 더 이상 커지지 않게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약이 안 들었다는 걸 알았으면 투약을 중단하고 물리적 제거를 했어야 했어요..."

어쩐지 식은땀이 뒷목을 타고 차갑게 흘렀다.

"종양이 끈적하게 변해서 대뇌동맥을 감싸고 있어요. 전부 제거는 어렵습니다. 감마나이프 시술도 겸해야 하는데 힘들 거예요. 하지만 환자가 젊으니까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진료가 끝나고 신촌 근처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으며 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동안 고생 많았니 아빠가 미안했다"

"미안할게 뭐 있어."

나는 살갑지 못한 딸이었다. 어쩐지 국수가 넘어가지 않았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편했다.

아버지는 기분전환 겸 병원에 돌아가는 내내 그동안 다녔었던 병원에 대한 욕을 시원하게 해댔다.

수술이 끝나고 돌아가면 의료사고로 고소를 할 거다 뭐다 했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개개인이 나서서 싸우기엔 너무나 긴 싸움이 될 거란 걸, 그리고 승산이 적다는 것을.

그래도 시원하게 욕해주는 아버지와 친구들이 은근히 위안이 되어서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21년 7월 5일로 입원이 결정되고 나는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회사에 내 업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까지 엑셀과 씨름하며 내 업무를 간소화시켜줄 자동 계산기를 만들고

3개월치 업무의 큰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PPT로 업무 매뉴얼을 만들었다.

거래처에도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인수인계자를 잘 부탁드린다 말하고

달력에 주마다 해야 하는 업무를 잔뜩 적어놨었다.

인수인계를 마치며 회사라는 집단에서 개인의 질환은 그저 오류처럼 느껴졌다.


이 회사에서 없어선 안될 사람이라는 기분에 취해 여태껏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인수인계를 마치고 내 업무를 인계받은 인수자가 연신 불평불만을 해대자

어쩐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코올중독자들이 알코올중독이 되는 이유가 '부끄러움'때문이라는 글을 예전에 봤었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다. 알코올중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번 술을 마실 때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셔댔고,

수술 일주일 전 병가 전 마지막 출근 날 나는 만취해 욕조에서 미끄러져 오른쪽 발바닥이 부러졌다.

아버지가 김포에 있는터라 차가 필요했고 아버지는 차가 없었다.

내 차를 끌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멍청해서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허벅지를 이용해 3시간 반 운전해서 김포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주변사람들이 나의 기행에 놀랄 때마다 내 성격이 이상하다고는 느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많이 몰려있었다고 느낀다.

이제야 생각하면 미련하고 바보 같지만 모든지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혹시 나처럼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인간은 서로를 도와주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 것도 사실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KakaoTalk_20250604_125631661.jpg 그날의 부러진 발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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